1. 스가와라 코시



  연습 시합 일정이 잡혔다.

  상대 고교는 유명한 팀은 아니었다. 최근 부활하고 있는 카라스노와 대결해보기 위해 연습 시합을 신청하고 있는 고교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팀들과 여러 번 겨루었었다. 그들이 약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배구공을 쥐고 있는 사람은 모두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 눈앞의 적을 쓰러뜨린다. 다음 경기로 나아간다. 상대의 1점을 끊는다. 단 1점이라도 성공시킨다.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약체라고 비웃을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 마음가짐이 없는 배구부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패배 역시 특별한 일은 아니다. 공을 떨어뜨리면 지는 스포츠가 배구라지만, 공을 떨어뜨리지 않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을 잡겠다는 마음이기에, 그런 마음이 좀 더 절실한 쪽이 승리한다.


"스가, 낙심하지 마라."

"……미안."

"미안할 거 없어. 점수 차도 아슬아슬하고, 실력차도 크게 나지 않았잖아."

"그, 그래 스가. 어차피 연습 시합이고. 우리 컨디션도 안 좋았고. 그, 그렇지?"


  스트레이트로 승리를 따낸 상대 고교가 의기양양하게 돌아간 뒤, 나는 체육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카게야마는 코트에 없었다. 그날따라 몸상태가 안 좋았던 모양인지, 벤치에서도 화장실을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돌아가 쉬는 게 어떻냐고 권유했을 때도 카게야마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벤치에 남았다. 좋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상대팀의 세터에게서, 그리고 이런 나에게서라도 무언가를 배우려는 자세는.

  

  상대방이 내려친 공은 자국을 남긴다. 보이지는 않지만, 다음 번엔 저곳은 반드시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마음의 자국. 그리고 그 공이 마지막 득점이 되었을 때, 패배자들에게 남는 쓰라린 상처.


  내가 이어준 공이, 제대로 하늘에 닿지 못했을 때의 자괴감. 콤비네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초조함. 동료들의 믿음에 보답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배신감. 차갑게만 느껴지는 감정들이 메아리쳐서, 골수가 얼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상처를 계속 헤집었다.


  코치님은 오랜만에 주전으로 출장하는 나를 위해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부원들을 위주로 경기를 구성하셨다. 나는 이 멤버라면, 긴장하지 않고 제대로 실력을 보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리였다. 긴장하고 긴장해서, 나는 공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두 세트를 뛴다는 흥분감이나 계속되는 실점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코트에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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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전


  











  




 


WRITTEN BY
세메터리

,


  도서관은 눈을 빛냈다.


  어둠이 희미하게 내리쬐는 거리엔 불빛 사이로 언뜻언뜻 눈발이 휘날렸다. 도서관은 일찌감치 닫혔을 시간이었다. 사서도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고, 경비 아저씨는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멍하니 점멸등을 주시하는 사이, 도서관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땠어?"

"이쪽 줄은 여전히 사람이 드문걸."

"도서관에서까지 정치책을 읽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정치인들한테 너무하시네요!"


  우리에겐 들리지 않지만 그들은 분명히 떠들고 있다. 활자의 웃음이다. 손때가 묻어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책부터 어제 들어온 신간까지 왁자지껄 내키는 대로 검은 침을 묻히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도서관이다.


"어제 있잖아, 코묻은 남자애가 막 이쪽으로 손을 뻗는 거 있지? 닿으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했다니까!"


  가장 높은 곳에 꽂힌 인터넷 소설이 말했다. 그녀는 가장 수다스러운 책중의 한 권이다. 그 열에 꽂힌 책들은 판타지 소설이나 인터넷 소설 등, 순수 문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책들이다. 그런 만큼 사람들의 때가 타 있기도 했다. 이들은 사람 사는 이야기에 환상을 집어넣는다. 조곤조곤 자기들이 본 풍경을 이야기하는 수필들과는 달리 이들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상상의 나래를 등에 심어 넣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몇 년 지나면 걔도 키가 훌쩍 크겠네?"

"그렇겠지? 그때면 우리는 완전 고서고!"

"아유, 그런 얘기는 하지도 마라 얘!"

"태워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들은 그나마 사람이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기다. 다른 고전 문학이나, 인문학 도서들은 눈으로 읽어도 잠이 오는 이야기를 입으로 떠들기 때문에, 굳이 감기는 눈을 벌리면서까지 그들을 찾아볼 필요성은 없을 것이다.


  책들이 기다리는 것은 신간이다. 책들이 아는 것은 자기들이 담고 있는 것과 이 도서관 안에서 보이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세상사를 담고 들어오는 신간들이 주목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여어, 신입. 어제 들어왔다지?"

"예, 옛! 어제 까만 딱지 붙였습니다!"

"뭐야, 소설이야? 시사는 없냐?"

"이, 이번엔 소설만 입고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거 실망이구만. 요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 궁금했는데."

"뭐가 그리 궁금하우.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지."


  표지가 낡아빠진 고전 소설 두 권이었다. 이 두 권은, 내일이면 이 도서관을 떠나게 된다. 인기도 많은 편은 아니지만, 최근 새롭게 번역한 같은 내용의 책이 출판되어 이 도서관도 신간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너구나, 이번에 새로 들어온 녀석이."

"아, 예."

"우리 손주 보는 거 같아서 괜히 좋구먼."

"이 사람아, 좋긴 뭐가 좋아? 이 녀석들이 우리 자리 채가는 거 아녀!"

"뭘 그리 화내고 그래요. 사람이 돌고 돌듯 책도 돌고 도는 거지."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뭐야?"

"두 분은 여기 언제부터 계셨나요?"


  신간 X의 질문이었다. 구간 X가 신간 X를 째려보자 구간 Y가 구간 X를 제지했다. 어떻게 제지했냐고 물으시냐면, 예전에 책갈피로 쓰곤 했던 책의 머리 꽁지로 제지했다고 하자. 구간 X와 Y의 종이는 누렇게 물들었지만, 신간 X는 매끄러운 검은 겉표지와 새하얀 종이가 대비되어 굉장히 세련된 인상을 주었다. 신간 Y는 파릇파릇한 느낌의 일러스트가 표지에 새겨진 새하얀 소설책이었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검은 양복을 입은 새하얀 피부의 소년과 하늘하늘한 순백의 드레스를 몸에 걸친 역시나 하얀 피부의 소녀였다. 


  신간 X는 호기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구간 Y는 그 모습이 과거의 구간 X를 빼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옷을 새로 빼입어도, 내용물은 같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구간 X의 반응은 어쩌면 일종의 동족 혐오인지도 몰랐다.


"글쎄다, 적어도 10년은 넘었을 게다."

"우와, 10년이요? 그렇게 오래 있을 수도 있어요?"

"예전에는 그랬지. 요즘에는 책이 워낙 많이 나오고 빨리 바뀌고 하지만 말이다."

"그 1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나요?"


  신간 Y의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구간 X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구간 Y의 눈총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흠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릴 빌려갔지. 지금은 대통령이 된 소년부터 장관이 된 누구누구까지~"

"그 애들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우리가 어떻게 아우? 하여튼 허풍하고는."

"허풍은 무슨 허풍이야! 우리가 어디어디 대학 100선에는 못들어가도, 어엿한 고전이란 말이지. 원래 사람은 고전을 읽어야 사람이 되는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저희가 이렇게 새로 출판될 일도 없잖아요."


  구간 X의 말을 신간 X가 거들었다. 같은 내용의 책이라 죽이 잘 맞는 건지, 신간이 구간의 비위를 맞춰준 건지 알아볼 길은 없다.


"그럼 두 분은 이제 어떻게 되시는 거예요?"


  신간 Y의 천진난만한 질문에, 구간 X와 Y는 당황했다. 뻔한 일이었다. 중고 서적으로 다른 곳에 넘겨지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낱장으로 분해되어 다른 것으로 재사용되거나, 혹은 불태워질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 될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X와 Y는 그 질문에 대답해줄 수 없었다.


"바보야. 당연히 새단장을 하는 게 당연하잖아."

"새단장?"

"그래. 두 분은 이제 옷을 새로 입고, 어쩌면 내용도 다시 가다듬어서, 새로운 책이 될지도 몰라."

"우와, 그건… 멋지다!"


  신간 X의 말은 구간 X와 Y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누렇게 뜬 자신들이 새로운 책이 된다? 요즘 기술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자신들을 그렇게까지 재활용해줄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쓰는 게 미덕이 된 지금, 자신들을 다시 책다운 책으로 사용해 줄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그럼 두 분은 나중에 어떤 책이 되고 싶으세요?"


  신간 Y의 질문이 이어졌다. 구간 X와 Y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이루어지지 못해도 꿈꾸는 것은 허락될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나는 성공한 사람의 수기집이 좋겠다!"


  구간 X가 말했다.


"또 주책이요?"


  구간 Y가 옆에서 옆구리를 찔러댔다.


"주책이 아니라니까! 이게 바로 로망이라는 거지! 요즘 베스트 셀러라고 하는 책들은, 거의 그런 책이라고! 사람들은 성공하고 싶어서 성공한 사람들을 베낀단 말이지. 그런 책들 안에는 다 그럴 듯해 보이는 것들을 가득 채우는 게 당연지사지! 나도 이왕이면 희망 같은 것만 말해 보고 싶어!"

"하긴 저희 내용은 우중충하니까말이죠."

"그래서 네 표지도 까만 거냐?"

"그런가 봐요!"


  서로 만담을 나누는 X들을 무시하고, 구간 Y가 말을 이었다.


"난 새파란 애들이 사랑을 하는 그런 책이 되고 싶구나. 로맨스라고 하던가? 그런 것 말이지."

"하지만 저희도 사랑 얘기가 많지 않아요?"

"우리가 품고 있는 건 옛날 귀족들이 하하호호하는 것들이잖니. 요즘의 자유로운 연애를 품고 싶구나."

"좋네요! 어떤 시대든 간에 사랑은 소중한 거지만요!"

"위대하기도 하지!"


  분위기는 어느새 화기애애해졌다. 따뜻한 바람 하나 나오지 않는 도서관이었지만, 분위기만큼은 벽난로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손녀였다. 


  내일이면 이 아이들을 못본다는 사실에 구간 X와 Y는 침울해졌다. 잠깐 사이에 얼마나 정이 붙었던 건지, 때 하나 타지 않은 이들의 모습이 눈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12시간 후면 이 도서관을 떠난다.


  신간 X와 Y는 잠들어버렸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던 구간 X와 Y는 이따금 눈이 치는 창문을 바라봤다.


"지금 기분이 어때요?"

"말도 마. 당장 베스트 셀러라도 된 기분이야."

"호호, 내일 운명도 모르는 사람이."

"어찌 됐든 간에, 모든 책들에게 기다리는 운명이잖나. 난 지난 10년간을 후회하지도 않아. 많은 사람들에게 익히고 그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많은 교훈을 줬다고 생각해."

"하지만,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는요?"

"그건 이 아이들이 해주겠지."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살아 가는 거나 다름이 없군요."


  성탄 불빛이 거리를 메웠다. 인적이 뜸해진 거리는 조용했다. 새하얀 음표들이 바람에 날렸다. 징글벨, 징글벨…… 무인 라디오에서 울리는 노래가 눈을 부르는 것마냥, 노랫소리가 점점 작아질 수록 눈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밤하늘은 포근했다. 부디, 살아 있는 이들에게 어떤 축복이 내려지기를. 별들은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WRITTEN BY
세메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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