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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똑.

토모야는 문을 노크했다. 문 옆에는 제대로 초인종도 붙었고, 전자 도어락도 달린 평범한 문이었지만, 그라면 이 쪽을 좋아할 것 같았다. 그 히비키 와타루의 집이라기엔 입구부터 평범했다. 자신의 집과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토모야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천장과 바닥이 뒤집혀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오오, 토모야 군! 역시 놀라울 것 없이, 시간에 맞춰 오셨군요!"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야? 변태 가면."

  

와타루가 졸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유메노사키에 신입생이 들어오기 전인 봄방학이었고, 토모야는 곧 2학년이 된다. 와타루는 졸업하고 나서 소식이 없었는데, 개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갑작스레 토모야에게 연락을 해왔다. 


"토모야 군도 만나자마자 그렇게 대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저는 가면을 쓰지 않았는데도요!"

"변태 가면이 변태 가면이지, 그럼 뭐라고 부르란 말이야?"

"어쩜 1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는지!"

"됐고, 호쿠토 선배는 일이 바빠서 못 온다고 했어."


언제나의 그처럼 화려한 포즈를 지으며 웃던 와타루는 돌연 움직임을 멈추고, 턱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라면 일이 바쁠만도 하지요. 그도 이제 어엿한 유메노사키의 최고 학년이니 말이죠."

"1년이 지나니까 더 멋있어졌어. 나도 일이 있으면 안 오고 마는 건데, 우리는 아직 정비기야."


멤버가 전원 3학년이 된 트릭스타는 강력한 유닛으로 거듭났다. 3학년들이 졸업한 다른 유닛에 비해 방학에 일감이 많이 들어와서 눈코뜰새 없이 바빠졌고, 그러면서 그들은 점점 강해질 터였다. 반면에 라빗츠는 아직 나즈나가 빈 자리가 허전하기만 했다. 개개인의 기량은 확연히 늘어났지만, 이 기량을 조율하는 건 스스로의 몫이 됐다.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신입을 받을 때까지는.


"그래도 핑계를 대지 않고 와주셨군요! 호쿠토 군의 부재는 예상했습니다. 물론 토모야 군이 오리라는 것도! 자, 들어오시죠. 히비키 와타루 유일의 처소에."


와타루는 토모야를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토모야는 평범하게 신발을 벗고, 실례합니다, 라고 말하며 와타루의 집에 들어섰다. 평범한 복도였다. 방들이 평범하게 복도를 두고 이어졌고, 어디 하나 이상한 점이 없었다. 그야말로 사람이 살 법한 집이었다. 


"토모야 군, 신경쓰이는 점이라도?"

"아, 아뇨. 혹시 남의 집에 들어온 건 아닌가 싶어서."

"이 집이 히비키 와타루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인가요?"

"그, 그건… 아니겠지만……."

"아뇨, 맞습니다! 이 곳은 엄밀히 말하자면, 저의 집은 아니지요. 저의 소중한, 가족의 집이랍니다."

"놀랐잖아. 난 가택침입이라도 한 줄 알았어."

"후후후, 범죄는 저지르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길."


와타루는 토모야를 거실로 안내했다. 거실 역시 이상한 점 없이, 안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등을 기댈 푹신한 소파, 바닥에 깔아둔 부드러운 깔개, 추우면 몸을 덮을 이불까지 부족한 것이 없었다. TV와 앉는 곳까지의 거리까지도 적당해서, 이 거실이 영화 시청을 위해 설계된 것처럼 느껴졌다.

와타루가 토모야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함께 영화를 한 편 보기 위해서였다. 평소에도 영화를 자주 보는 두 사람이었지만, 와타루가 토모야를 불러서, 함께 보자고 한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와타루가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토모야는 놀라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걱정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일정을 취소하고서라도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토모야는 와타루가 간식 거리를 준비해 오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집을 구경시켜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와타루가 토모야를 부른 이유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한번 온 곳에 다시 못 오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다음에 와타루의 가족을 만나, 함께 저녁을 먹으며 집을 소개해달라고 하자. 토모야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와타루를 상상하며 웃었다. 

그런데, 지금은 부모님이 안 계신 건가? 거실 외의 방은 모두 불이 꺼진 상태였다. 토모야가 올 때까지 와타루는 혼자 있었던 셈이 된다. 조금 일찍 올걸. 토모야는 살짝 후회했다.


"기다리셨군요, 토모야 군!"

"아, 뭐. 네."

"마실 것은 코코아가 좋습니까? 아니면 차?"

"코코아로."

"네, 여기 있습니다."

"어, 미리 타온 거예요?"

"그럼요. 토모야 군이 무엇을 원할지 정도는, 훤히 꿰뚫어보고 있으니까요."

"졸업을 해도 변하질 않네, 당신."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요."


와타루는 자신의 컵을 들고, 간식 거리를 토모야와 자신의 사이에 두었다. 각종 과자가 수북이 쌓여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집어먹으면 접시가 빌 정도였다.


"왔다갔다할 필요가 없겠네요. 양이 적당해서."

"네. 다만, 2인분을 계량해야 했기에 조금 고민했습니다. 토모야 군이 얼마나 먹을지 정도는 예상했지만! 그걸 손으로 덜어내는 건 다른 일이니까요. 자, 화장실이라도 다녀오죠. 영화의 중간에 일어서면 곤란하니까요."


두 사람은 차례로 화장실을 다녀왔다. 손을 깨끗이 씻고, 이제는 정말로 영화를 볼 차례. 와타루는 DVD를 꺼내 재생했다. 


"어라, 변태 가면. 영화를 볼 때는 50음도의 순서로 본다고 하지 않았어?"

"네, 분명 그렇게 얘기한 적도 있었죠."

"뭐야, 그 애매한 태도는. 아무튼 이 영화, '아'로 시작하잖아. 처음으로 돌아간 거야?"

"돌아갔다기 보다는, 토모야 군과 함께 영화를 보는 일은 처음이니 말이죠. 그러니 영화의 순서도 처음으로 두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렇구나. 아,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했다.

히비키 와타루는 히비키 와타루였다. 그의 행동이, 조금 꺼림칙했지만. 일단 자신을 놀래키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일상적인 행동에, 히비키 와타루를 조금 섞어둔 듯한 느낌이었다. 

아, 부모님이 지금 안 계시냐고 묻는 것도 깜빡했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도 잊어버렸어. 영화가 끝나면 물어봐도 되겠지만, 난 영화가 끝나면 돌아가야 하니까 타이밍이 맞지를 않네. 다음에 다시 부르면 찾아오면 되겠지. 과자를 한 움큼 집어먹자, 와타루도 한 움큼 과자를 가져갔다.

영화의 색감은 형형색색이었다. 어두운 거실이 다양한 색으로 변하는 광경은,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보물이다. 비록 타인의 집이지만, 이 일상의 공간이 몽환적으로 변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와타루가 집에서 홀로 영화를 보는 이유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이 집에, 기이함을 조금이라도 불어넣고 싶어서일지도 몰랐다. 

토모야는 지금 만족하고 있었다. 편안한 자리, 오랜만에 만나는 선배, 재밌는 영화. 그런데,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와타루를 위로해준답시고 왔는데, 오히려 자기가 아이돌의 압박감에서 조금, 해방되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제딴에 나를 위로해주겠다고 부른 건가? 이거, 괜히 걱정해줬네.

영화는 꽤 길었다. 러닝타임은 두 시간 정도였지만, 영화에 몰입감이 있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 킬링타임용으로도, 생각할 점이 많은 영화로도 보일 수 있었다. 와타루도 토모야도, 나름의 판단을 위해 진지하게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눈에 담았다. 이 영화가 끝나고 나면, 서로 감상을 나누려나? 이 장면은 좋아할 것 같으니까, 기억해뒀다가 말해주면 좋아하려나. 뭐, 이 사람은  예상했습니다! 라고 웃기는 하겠지만. 

영화가 끝나도, 부장과 더 같이 있을 수 있겠구나. 


영화가 끝났다. 집에서 볼 때는 크레딧이 흐를 때도 불을 켜지 않으니까 마지막까지 여운에 잠길 수 있다. 토모야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과자를 집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아직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과자는 여전히 토모야의 손에 잡힐 정도로 남았다. 크레딧이 전부 내려갔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부장? 영화 끝났어요. 불, 켜도, 되는데……."


그 순간 마시로 토모야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도했다. 히비키 와타루는 여전히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이었다. 그가 무대 위에서밖에 흘리지 않는 그것이었다. 언젠가 한 번, 그 이외의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 역시 연기인지 아닌지 토모야는 알지 못했다. 그럼 이 눈물 역시, 그의 연기일지도 모른다. 


"뭐하는 거예요, 부장. 안 놀란다구요?"

"어라, 무슨 말씀입니까 토모야 군? 잠시 여운에 빠져 있었을 뿐이랍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 우는 척하고 있잖아?"

"……네? 이 히비키 와타루가 울음을?"


와타루는 오히려 되묻고는, 자신의 볼을 더듬었다. 분명 따뜻한 것이 훑고 지나간 흔적이 있어, 턱에 눈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이거, 실례를 범했군요."

"어? 진짜로 우는 거였어? 영화가 그렇게 감동적이었나? 그런 종류였나……?"

"아뇨, 다른 종류입니다. 이건 이 히비키 와타루의…… 미천한 모습이죠."

"정말로 무슨 일 있었어? 도움이 필요하다면야, 말하면 되는데. 같은, 동아리였고."

"아아, 연극부. 저의 왕국……. 그렇습니다. 저는 그리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워 해? 당신이?"

"부정하고 있었습니다만, 달라지는 건 없군요. 저는 지금, 사랑을 앓고 있답니다! 사랑스러웠던 과거에, 유메노사키에, 과거의 왕국에!"

"하지만 졸업했는데…… 진로는 확실하잖아? 부장이라면 연극계에 얼마든지 진출할 수 있잖아. 벌써, 계약도 했다고 들었고."

"후후후, 토모야 군. 아무리 저라도, 아직은 10대입니다. 이 세계는 히비키 와타루의 세계는 될 수 없더군요. 저는 이 세계에 적응해 가야 합니다. 좀 더 많은 무대에 서기 위해,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이어지기 위해……."

"부장, 당신……."

"커뮤니케이션이란, 참으로 어렵더군요. 사람 대 사람으로, 평범하게 친해지는 법을 잊고 있었습니다. 수영하는 법도 모르고, 물 위에서 허우적댈 뿐이었죠. 너무나 지쳤던 겁니다. 하지만 토모야 군과는, 이렇게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고, 함께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 그런 말해도 기쁘진 않아!"


토모야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단순히 제 감상일 뿐이랍니다? 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죠."

"다른 이유?"

"토모야 군은, 이제 돌아가야 하니까요. 오늘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는답니다. 아마 토모야 군이 돌아가면, 저는 계속 영화를 보겠죠. 아침이 뜰 때까지…. 내일은 공교롭게도 일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아쉽군요. 이대로, 토모야 군을 보내는 건."


와타루는 다시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토모야는 크게 당황해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와타루는 과자를 한 움큼 집어먹었다.


"아아, 너무 이야기를 해버렸군요, 그럼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토모야 군. 정말 즐거웠어요. 잊을 수 없는 시간일 겁니다. 그리고, 고……."

"남을게!"

"……네?"

"내일 일정 없댔지? 마침 잘 됐네. 나도 없어! 이제 2학년이니까, 부모님에게 연락해서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간다고 할게. 둘이서 실컷 영화를 보자. 그리고 다음에도, 시간이 나면 찾아올게. 아니면 부장이 우리 집에 와도 좋아."


토모야는 해결책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어, 신나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와타루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오히려 슬픈 눈으로, 토모야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저를, 동정하는 건가요, 토모야 군?"

"으응? 아, 아니. 그게, 나도 이렇게 돌아가긴 좀 그렇고."

"저는 추락했습니다. 정확히는, 다시 날아오르기 위한 준비지만요. 그런데 발돋움을 하기 위한 땅은 너무나 질척거려서, 제대로 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저를 위로해주면, 평범한 토모야 군은 온 몸에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버릴 겁니다. 저는, 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부장. 당신은 인간이잖아?"

"인간…… 네. 저는 인간이죠. 새도, 토끼도 아닌 인간."

"그러니까 나도 같은 인간이야. 당신이 과거에는 기인이라고 불렸어도, 지금은 힘든 거지? 그럼 진흙 정도야 조금 나눠도 괜찮잖아. 당신이 저 하늘에 있어서 내가 숨이 막히는 것도 아니니까. 얼마든지 떨어버릴 수 있는걸? 나도, 조금은 성장했어. 사람은 누구라도 좌절하고, 떨어지기도 해. 당신은 기인이니까 익숙하지 않은 거지.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세상이야. 돕게 해줘. 부장."


와타루는 토모야의 말을 듣고는 벙쪄 있었다. 이윽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왜 웃어?!"

"앗핫핫핫하! 제가, 토모야 군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놀랍군요! 그야말로 Amazing☆ 좋습니다. 토모야 군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제가 봐드리도록 하죠. 오늘 밤은, 당신과 나만이 있는 세상입니다. 토모야 군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하아, 물론이지. 얼마든지."

"그럼 과자를 더 가져오죠. 중간에 졸리다면 언제든지 이불을 덮고 자도록 하세요. 손을 댈지도 모릅니다."

"소, 손을 대……?"

"물론 농담입니다! 놀라셨군요! 뭘 기대한 건가요, 토모야 군? 저는 궁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답니다!"

"시끄러워! 빨리 과자 가져와!"


그날 밤, 와타루의 집 거실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들은 웃고, 떠들고,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정말로, 즐거운 밤이었다.


WRITTEN BY
세메터리

,

     프로듀서과는 새로운 전학생을 받았다. 최초로 프로듀서과에 입학한 학생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선보인 관계로, 시험 삼아 학기 중에 전학오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자, 과연 소문을 듣고 전학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한 명의 프로듀서가 모든 유닛의 프로듀스를 전담할 수는 없기에, 전학생들은 프로듀서과의 교육 하에 한 유닛을 담당하는 형식으로 프로듀스를 시작했다. 프로듀서의 선택과 유닛의 승인이 있다면 프로듀스 계약이 성립한다. 

비록 패배하긴 했으나, 여전히 학원 굴지의 유닛인 fine에는 많은 프로듀서들이 몰려들었다. DDD에서 승리한 유닛인 Trickstar는 이미 첫번째 전학생이 프로듀스하고 있으니, 그에 비견되는 학원 굴지의 유닛을 프로듀스하고 싶다는 마음 탓일 것이다. 그런 연유로, 학생회장이자 fine의 리더인 텐쇼인 에이치와, fine 소속의 후시미 유즈루가 프로듀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이 말은 즉, 텐쇼인 에이치가 본인의 손으로, 자신들의 프로듀서를 뽑았다는 의미였다.


"……신뢰입니다."


텐쇼인 에이치는 프로듀서로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그녀는 당연한 듯이 이렇게 말했다. 에이치는 이 단어에서 여러 관계를 유추해냈다. 프로듀서와 유닛과의 신뢰가 먼저일 것이고, 유닛 멤버 간의 신뢰도 단연 중요하다. 그리고 아이돌과 팬 사이의 신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속성이다.

레슨 능력, 지식, 사랑 등 탐탁치 않은 답변 사이에서는 그나마, 이 답변이 fine의 리더의 마음에 들었다. 그도 Trickstar와의 싸움에서 느낀 것이 있기에, 어쩌면 그녀가 fine에 없던 신뢰라는 것을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텐쇼인 에이치는 후일 절망하게 된다. 차라리 자신의 말대로 움직이는, 인형을 골라냈어야 한다고.


-


fine는 1학기에 비해 더욱 성장했다. 새롭게 들어온 프로듀서는 과연 유능했고, 끊임없이 fine의 성장을 촉진했다. 그 성장을 바라본 사람들은 프로듀서의 능력을 칭찬함과 동시에, 텐쇼인 에이치의 선구안을 부러워했다. 

fine의 프로듀서, 쿠로미네 미카미는 평소에는 딱딱한 인상이지만 업무에는 열성적이며, 책임감 있게 유닛을 프로듀스해왔다. 가끔 기이한 행동을 했으나, fine에는 히비키 와타루가 있었다. 재능에 잇따르는 기행 정도는 fine와 그들의 팬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fine는 서서히 그들의 프로듀서에게 마음을 열었다. 학생회의 일을 돕거나, 함께 티타임을 가지며 쉬거나, 에이치의 병문안을 가거나 하며, 그들은 프로듀서와의 신뢰를 느꼈다. 

에이치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프로듀스 관련으로만 그녀와 대화를 하던 에이치는 어느새 좋아하는 음식에 관해, 그녀의 행동에 관해, 자신의 상태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어떠한 섬뜩함도 느끼지 못한 것은 에이치의 실책이었을 따름이다. 

그 텐쇼인 에이치가 아무 것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프로듀서의 애정은 보기와는 다르게 각별했다. 에이치의 몸 상태에 따라 수시로 바뀌고는 하는 fine의 일정을 세심하게 조정해왔다. 마치 언제 에이치가 아프고, 언제쯤 낫는지를 아는 것처럼. 단순한 의료적 통계만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그녀의 능력을 다시금 평가했지만 에이치는 모종의 불안을 느꼈다. 그러나 잘 움직이고 있는 유닛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꾹꾹 담아두었던 것이다. 

역시, 그래서는 안 됐다.


어째선지 꾸준히 활동하던 fine가 활동을 멈추는 주간이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에이치의 입원이었고, 프로듀서가 바빠서라는 말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 fine의 프로듀서이니 멤버들을 배려해 휴식기를 준 것일 거라고 이해했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이 둘 있었다. 

프로듀서 본인인 쿠로미네 미카미와 텐쇼인 에이치는 활동 정지의 이유를 안다. 그 이유는 아주 사적이었고, 폐쇄적이어야 했기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미카미가 움직이기 시작한 때는 그녀와 fine가 "우리는 서로 신뢰하고 있다"고 느낄 때, 정확히는 믿을 때부터였다.


에이치는 하지메가 돌아간 가든 테라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가든 테라스는 에이치에게 있어 심신을 안정시키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찻잔은 하지메가 가지런히 정리해두었다.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가든 테라스의 문이 열렸다.


"텐쇼인 선배, 계세요?"


에이치는 눈을 돌렸다. 미카미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자, 에이치는 표정을 풀며 그녀를 맞았다.


"날 찾아 온 거야? 그래, 무슨 일이야?"


     미카미는 일직선으로 에이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에이치는 홍차부의 활동에 자주 참여했던 미카미이니, 이 주변이 익숙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조금은 풍경을 즐겨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움이 남았다. 

일거리 때문이라면 전화도 괜찮은데. 에이치는 그렇게 착각하며 일어서려 했다. 툭, 그의 다리와 그녀의 다리가 맞닿았다. 에이치는 일어나지 못했다. 에이치가 고개를 들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에이치는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그녀는 에이치의 시선을 보았다. 


드르륵, 삭막한 소리가 가든 테라스의 적막을 비로소 그었다. 적막은 붉게 일그러졌고, 텐쇼인 에이치는 붉게 젖었다. 


에이치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숨을 멈추었다. 졸음처럼 밀려오는 아찔함이 이대로 의자에 등을 기대라며 재촉하는 듯 했다. 그는 의자의 팔받침을 잡았다. 살짝 물러선 미카미와의 틈으로 비척비척 벗어나서는 구급상자에 손을 뻗었다. 익숙하게 붕대와 소독약을 찾아낸 그는 미카미의 손목을 잡았다. 상처는 아주 가는 일직선이었지만 피가 끊이지 않고 솟아나왔다. 힘이 약했는지 지혈이 오래 걸렸고, 미카미의 손목에는 붕대가 감겼다. 


"……미카미쨩."

"네, 선배."


왜 그랬어? 라는 말을 씹어삼켰다.


"……이번주는 쉬자."

"네."

그날 에이치는 스트레스로 입원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누군가는 과일 바구니를 두고 갔다. 에이치는 이따금 구역질을 했다. 팔에는 수액을 꽂고 있어 움직일 수 없으니, 비상용으로 팔이 닿는 거리에 비닐봉지를 달아두었다. 실제로 무언가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에이치 자신은 기억이라도 뱉어낸다는 심정으로 구역질을 해댔다. 

그녀의 피는 진했다. 묽고, 척 봐도 건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자신의 것과는 달랐다. 자기 관리의 산물이라는 거겠지. 에이치는 여전히 그 피에서 사고를 떨어뜨릴 수 없었기에, 차라리 그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에이치에게 가장 두려울 사고는, 그것의 부차물일 것이었기에. 

그가 잠시 진정하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텐쇼인 선배."


그녀였다. 사실 에이치는, 그가 지금까지 보고 경험하고 맡았던 것이 한낱 꿈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손목에 감긴 붕대를 본 순간 박살나버렸을 뿐. 

그래도, 안심하고 있었다. 병원에 흉기를 들고 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여기서 그녀가 다시 손목을 긋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목적은 작은 사과와, 선물로 이루어진 병문안이겠지. 에이치는 애써 표정을 폈다. 

그녀는 텐쇼인 에이치의 시선을 보았다. 그것을 느낀 에이치는 본능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그녀의 눈에는 분명 동경이 담겨있을 텐데도. 

그녀는 여전히 동경을 담고,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쥔다. 손가락을 죈다. 그녀의 목에서 탄식이 꾸역꾸역 솟아오른다. 충혈되어 간다. 


에이치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몸을 일으키면 수액의 바늘이 빠질 것이고, 자신의 팔에서 피가 흐를 것이고, 삽시간에 자신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간호사를 부를 것이다. 간호사는 언제든 신속히 달려온다. 하지만 간호사를 부른다면? 그녀는 분명히 끌려간다. 자신이 없는 fine를 이끌어줄, 프로듀서가 사라진다. 그녀라는 프로듀서를 뽑은 실책이 드러나고 만다. 


사랑스러운 악마야, 너는 벌레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구나. 


에이치는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를 집어, 가능한 한, 있는 힘껏, 그녀를 향해 던졌다. 동공이 뒤집히려 하는 그녀는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이마에 사과를 얻어맞고 나동그라진다. 


     그녀가 쓰러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에이치는 아주,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이대로 그녀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도 알지 못하게, 은밀히 사용인을 부를까? 지금 그녀의 상태는 좋지 않아. 내 쪽에서 먼저 안정을 취하게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지금 여기서, 그녀를…….

미카미가 몸을 일으켰다. 조금은 놀란 듯, 머리를 감쌌지만 이상은 없어 보였다. 


"미카미쨩?"

"……네, 선배. 그런데,"


미카미는 팔을 떨며 시선을 피하는 에이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침대 위에 손을 올리고, 에이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는 바퀴벌레가 아니에요."


에이치는 몸을 떨었다. 식은 땀을 흘렸다. 


"…무슨 말일까, 미카미쨩. 놀라서… 말리려던 것 뿐이야."

"몸도 안 좋으신데, 푹 쉬셔야죠."

"아하하, 날 걱정해줘도 괜찮은 거야?"

"걱정해드리려고 왔으니까요."


공포스럽기까지만 했던 조금 전까지는 달리, 그녀는 평소와 다름 없는 상태로 말했다. 에이치는 휘말리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금 불쾌하기도 하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녀의 행동은 이상했다. 손목을 긋고, 자신의 목을 조르며 자신을 해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관리하는 유닛의 리더의 앞에서였다. 에이치는 그녀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에이치는 그녀를 신뢰했고, 그녀 역시 에이치를 신뢰하고 있을 테니까. 


"……미카미쨩. 혹시, 걱정이 있다면. 마음 놓고 말해도 좋아. 우리는 서로를 돕는 관계이기도 하니까, 너만 괜찮다면 이야기를 들을 시간을 낼게. 퇴원은, 금세 할 테니까."


미카미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에이치는 그녀의 눈에 달콤함을 보았지만, 정체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 감정은 그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그때 봐요, 선배."


     이 병실에는 거울이 없었다. 에이치는, 이 날 자신의 표정을 전혀 볼 수 없었을 것이고, 미카미는 그의 모든 표정을 보았다. 


-


     에이치가 퇴원하고, fine의 활동은 정상적으로 재개되었다. 에이치는 레슨이 끝나는 시간마다 가든 테라스로 미카미를 불렀다. 

자해의 이유를 직접 물어야 할까,  천천히 이야기를 끌어내야 할까? 에이치로서도 천천히 다가가야 하는 고민이었다. 지금껏 자신이 해왔던 싸우고, 쓰러뜨리고, 짓밟는 사투가 아닌, 신뢰하는 이들 간의 밀고 당기기는 에이치에겐 낯선 싸움이었으리라. 그러나 해내고 싶었다. 그는 말해주고 싶었다. 살아가도 된다고. 어떠한 죄를 품고 있다고 해도, 살아 있는 것에, 결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에이치는 그런 소망을 담아 미카미에게 다가간다. 신뢰의 끈이 서로의 마음을 잇고, 희망을 전하는 차의 향기가 가든 테라스를 가득 채우는 날이, 이어져 간다. 그녀가 에이치의 눈을 바라보며 웃는 날이 계속되었고, 그녀는 자해를 멈추었다.

 

어느덧 에이치는 만족하면서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해를 멈추었으니, 이 티타임도 멈춰야 하나? 아니, 이 티타임이 그녀를 잡아주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 티타임이 끝나면, 그녀 역시 시작할지도 모른다……, 라며, 그녀의 미소에 익숙해진 에이치는 소중한 시간을 붙잡는다. 

당초의 약속은 미카미가 자해를 멈추게 돕는 정도였지만, 에이치는 그녀에게 티타임을 계속하자고 제안할 생각이었다. 오늘로 끝나야 하는 이 시간을, 좀더 잡아끌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새롭게 변할 시간에 기대하며, 무대에 선 듯, 어쩌면 그것과는 다른 감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든 테라스의 문이 열린다. 언제나의 시간처럼, 그녀는 얼굴을 보였다. 에이치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 역시, 에이치의 눈을 보았다. 그녀는, 심히 만족스러워보였다.

미카미는 자신이 열었던 문을, 등으로 밀어 닫았다. 그 자리에서 멈춘 그녀를 에이치는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매에서 익숙한 것을 손에 쥐었다.  

에이치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서고 말았고, 

미카미는, 지체 없이 손목을 그었다. 


"……아아."


에이치는 크게 탄식했다. 


"미카미쨩, 어째서야?"

"뭘 묻는 건가요, 선배?"

"지금의……, 아니, 처음부터의 일들을."

"정확히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답니다, 선배."

"네가 어지른 게 보이지 않아?!"


에이치는 소리를 지른다. 미카미는 자신의 손목으로 살짝 시선을 옮기고, 다시 에이치를 보았다.


"이걸 말하는 건가요?"


에이치는 그것이라고 단언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지른 건 그 이상이었고, 그것은 미카미로서는 볼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널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아주 큰 착각이었던 모양이야."


그는 간신히 서 있는 듯한 모양으로 벽을 짚었다. 숨이 가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아, 이건 모순이구나.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나를 의지한다고 생각했는데, 주제넘은 생각이었구나. 혼자서, 행복하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놓고 말았어. 너는 여전히 악의로구나. 내게, 무얼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그는 손을 놓고는, 가든 테라스를 천천히 걸어다녔다. 미카미에게서 튄 피가 그의 신발 바닥에  닿았다.


"혹시, 내게 죽음의 공포를 알려주고 싶었어? 그 정도는, 항상 느끼고 있었지만 말이야. 아니면, 내가 이곳에서 저지른 죄악을 심판하고 싶었을까? 후후, 나는, 이미 유랑하는 황제야. 시체를 물어뜯고 싶었던 거라면 이해할게."


점점 모여드는 피가 웅덩이를 만드는데도, 에이치는 그 위를 걸어온다. 그는 그녀 앞에 선다.


"역시, 모르겠어."

"무얼 말인가요?"

"네가 나에게 웃어준 이유."

"그리고요?"

"네가 손목을 그은 이유, 항상 내 앞에서만 그래왔던 이유, 이제서야 나를 배신한 이유……."


순수했던 피웅덩이에 불순물이 섞여들었다. 점점 투명하게, 한 방울 두 방울이 붉게 파장을 뿜었다.


"나를 싫어하는 이유 말이야……."


에이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아뇨, 선배. 좋아해요."


미카미는 고개를 숙인 에이치를 끌어 안았다. 에이치가 천천히 손을 떼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선배의 그 표정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녀는 에이치가 자신의 얼굴을 숨기지 못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계속, 보게 해주세요."



 


WRITTEN BY
세메터리

,


쥬시(十四)마츠도 산쥬시(三十四)마츠가 되는 날이 왔다. 언제까지고 아이들로 남을 수 없는 우리는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중 가장 빨리 어른이 된 사람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쥬시마츠였다. 그 뒤로 다들 꾸역꾸역 나이를 먹어갔고, 어른이 되어갔고, 어느새 서로 만날 약속을 잡아야 만나게 되는 사이가 되었다. 마츠노 가의 장남인 나, 오소마츠는 어느 날 쥬시마츠에게 연락을 받았다. 둘이서 술이나 한잔 하자는 연락이었다. 어차피 다른 녀석들도 휴일에는 딩가딩가 놀고 있을 텐데, 나만 부르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쥬시마츠는 좋아하던 사람과 헤어진 뒤로 사람이 무서울 정도로 변했다. 평소엔 하지도 않던 공부를 시작하더니, 갑자기 의대에 합격해버렸고, 기숙사에서 학교에 다닌다는 명목으로 집을 떠났다. 그 뒤로는 집의 밸런스가 무너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항상 소란스러웠던 잠자리가 조용해지고, 목욕하는 시간도 조용해지고, 밥을 먹는 시간도 조용해졌다. 다들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쵸로마츠도, 토도마츠도, 카라마츠도, 이치마츠도 집을 떠났다. 다른 집을 구했다뿐이지, 본질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유일하게 집에 남은 형으로서는 섭섭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 와중에 한참을 술자리에 나오지 않던 쥬시마츠가 연락을 하다니, 석연찮기는 해도 기쁜 마음으로 술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여어, 쥬시마츠. 꽤 오랜만이네."


쥬시마츠는 아니나 다를까 멀쩡한 정장 차림이었다. 그야 의사니까 당연한 거겠지. 혹시나 해서 기대했지만, 쥬시마츠는 그날 이후로 항상 그대로의, 평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조금 달아오른 채였다.


"어이쿠, 벌써 마시고 있었어? 형아가 그렇게 보고 싶었나 보네~"


나는 쥬시마츠의 맞은 편에 놓인 의자 위에 앉았다. 쥬시마츠는 몽롱하게 술병만 바라보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


"나, 차였어."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손님에게도 민폐가 될 테니,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가게, 어묵탕 말고는 어묵 종류를 안 파는구나. 


"뭐? 누구한테? 누군데 의사를 차냐! 어엉? 형이 혼내줄까?"

"……그런 얘기는 아냐."

"아, 응."

나는 괜히 동조해서 흥분해줬다가 핀잔을 맞은 나머지, 머쓱하게 자리에 앉았다. 쥬시마츠는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우선 한 잔 마시고. 

쥬시마츠는 의사가 되고 나서, 처음에는 선배의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성형외과였다. 돈은 꽤 잘 벌렸고, 그 선배도 쥬시마츠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돈을 잘 챙겨줬다. 그런데 돈을 좀 모으고 난 뒤, 그 선배에게 떠나야겠다고 말했단다. 이제 떠나야겠다고.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그 선배는 이해해줬다고 했다. 우리가 없어도 좋은 사람과 친구가 됐네, 쥬시마츠. 

두 잔째. 실은, 성형외과 이외에도 다른 의학적인 지식도 계속해서 공부했다고 한다. 쥬시마츠의 목표는 의사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여러 시골 지역에서 의료 봉사를 다니는 거였다. 치비타가 여기 있었다면 까고 있네~ 라고 소리 질렀겠군. 아무리 발전한 일본이라 하더라도, 문명의 최하한 선에 위치한 지역은 얼마든지 있었다. 쥬시마츠는 의료시설이 열악한 외진 곳을 위주로 방문진료를 다녔다. 그러면서 시골 지역들에 소문이 퍼지고, 방송에도 몇 번 나왔다고 했다. 쥬시마츠가 방송에 나오는 건 우리도 봤었기에, 여기까지는 우리 형제들도 모두 아는 얘기였다.

석 잔째. 여기서부터는 나도 모르던 이야기였다. 쥬시마츠가 방송에 출연한 이유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우리도, 부모님도 아닌 누군가. 역시 그녀였다. 쥬시마츠가 외진 지역을 위주로 돌아다닌 이유도 혹시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고, 의사가 된 이유도 니트가 아닌 당당한 사회인으로서 그녀 앞에 서기 위해서였다. 쥬시마츠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그녀의 이름 몇 자, 지금 변했을지도 모르는 머리 모양과 주근깨, 그리고 웃는 모습뿐이었지만, 끊임없이 돌아다녔다고 했다. 어르신들에겐 항상 그녀에게 해줬던 개그를 하면서, 친숙한 의사로서의 이미지를 다졌다고. 

넉 잔째. 그리고 드디어 일주일 전에 그녀를 우연히 찾았다고 했다. 그렇게 외진 지역에 살고 있지는 않았지만, 수소문으로 그녀의 집을 찾아다닌 결과였다. 쥬시마츠는 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중하지 않은 병에 걸린 그녀의 어머니를 무료로 진료해주고, 약을 처방해주고, 그렇게 떠났다. 그렇게 며칠씩 그 지역에 상주하면서 그녀의 어머니만을 봐 드렸다고 한다. 그녀와도 대화하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그녀는 통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쥬시마츠는 고백했다. 당신을 보고 싶었노라고, 10년째 당신을 찾았노라고, 그리고 지금 여기에 만나서, 너무나 기쁘다고. 쥬시마츠는 울었다. 그녀도, 우는 것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은 쥬시마츠와 함께할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이 쥬시마츠와 함께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그녀는 쥬시마츠에게 알려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쥬시마츠는 한 병을 다 비웠다. 나는 그 자리에 엎어진 쥬시마츠를 우리 집으로 데려와 재웠다. 쥬시마츠는 자는 척을 영 못한다. 이 이상의 얘기는, 묻지 않기로 했다. 


WRITTEN BY
세메터리

,


     

「재」가 되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이야기



written by 지교(@Ansanblue_Zigyo)



*죽음소재가 있습니다.

*리츠마오, 아라안즈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사라 마오의 장례식이 있었다. 사쿠마 리츠는 장례식에 나오지 않았다. 비교적 늦은 시간에 장례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쿠마 리츠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장례식의 시간은 분명 그의 참석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절차가 끝나감에도 방명록에는 그의 이름이 적히지 않았다. 

     그를 제외한 유메노사키의 모든 아이돌과 학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러 장례식에 참석했다. 꿈과 희망을 전하는 아이돌을 목표하는 학생들에게 검은 옷은 썩 어울리지 않았다. 그 위에 반짝이는 유닛복을 입어야 할 Knights도, 오늘은 검은 반팔만을 입었다.

     리츠를 찾아보자는 안즈의 요청에 따라, 안즈와 Knights는 사쿠마 리츠의 행방을 찾기 위해 나섰다. 트릭스타는 장례식장에 남아 기다리기로 했다. 각자 유메노사키 학원, 리츠의 집, 마오의 집 등 리츠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저녁에 시작되었던 장례식은 하늘에 달이 떠오를 때까지 끝나지 못했다.  


-


"친우의 영혼을, 이대로 보낼 셈이느냐?" 사쿠마 레이가 말했다. 

"왜 다들 그런 말을 해?" 사쿠마 리츠는 의문을 표했다.

"마-군이 죽었다니... 그럴 리 없잖아." 그 말에 레이는 한숨을 쉬었다. 


     사쿠마 리츠는 이사라 마오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오늘은 마-군이 안 깨워주면, 안 일어날 거야."


     리츠는 그리 말하며 관 속에 누웠고, 사쿠마 레이는 그 옆을 지켜주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레이는 무심코 리츠의 이마를 쓰다듬으려다 손을 거두었다. 


"……시끄러워졌네." 


     사쿠마 리츠의 감각은 여느때보다 민감했다.


"오호라, 너의 소중한 동료들도, 잠을 방해하면 용서치 않는 게로구나."


     레이는 관 속에서 잠을 청하는 자신의 동생을 보며 웃었다. 


"지금은… 좀 내버려둬. "


     리츠는 그렇게 말하며, 잠들고 싶다는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저 멀리서 츠키나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관의 입구를 닫아둔 뒤 경음부실에서 나왔다. 레이는 경음부실에서 최대한 멀어졌다. 


"츠키나가 군인가…… 송곳니가 꺾인 사자라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잘 모르겠구먼."


     레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달을 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밝게, 그리고 붉게 빛났다. 흡혈귀의 눈은 달빛을 받아 붉게 반짝였다.


"아아, 멀어지는구나. 앞날의 반짝임이……."


 

-


"인스피레이션이 솟아오르…지만, 나중으로 미뤄둘까♪"

"사자(死者)에게 실례입니다, Leader." 

"알고 있으니까 릿츠를 함께 찾아주고 있잖아?"

"하긴, 의외였죠. Leader가 동참해줄 줄은."  


     Knights는 유메노사키 학원 앞에 모였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리츠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리츠가 갈 곳은 별달리 없을 것이다. 


"쿠마 군의 집에는 없었다고 전학생이 그러던데. 그렇다면 역시 여기뿐이지. 가출할 녀석은 아니니까."

"편안한 잠자리를 찾고 있을지도?"


     레오는 일렬로 선 Knights의 기사들의 앞에 나섰다. 주변에 키를 받쳐줄 기물은 없었지만, 레오는 그 자리에 서서 Knights를 내려다보는 듯 했다. 그의 눈은 또다른 영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 그럼 여기서부터 다시 마음껏 개인주의다, 나의 Knights! 동료의 긍지를 위해, 맘껏 몸을 놀리고 날뛰도록 해!"


     그의 말과 동시에, Knights는 유메노사키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럼, 다들 갔으니까."


레오는 유메노사키의 안으로 빠르게 뛰어들었다. 그는 갈 길을 정했다. 언제나 걸어왔던 길이었다. 그의 발자국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왔다. 항상 Knights를 위해 걸었다. 발에 채이는 돌은 걷어차고, 벽은 쓰러진 자와 쓰러뜨린 자의 등을 밟고 뛰어올랐다. 밟을 것이 없다면, 무능한 동료마저 도움닫기로 썼다. 오직 자신의 다리로 걸었다. 

그 길이 종지부에 가로막힌 뒤로는 주저앉았고, Knights가 일으켜주었을 때는 그들의 어깨를 의지해 걸었다.

그 어깨에 조금만 더 기대고 싶으니까, 잠시만 다리를 움직이게 해줘. 


"……여기는 어떻게 알았누, 츠키나가 군?"

"넌 항상 피 냄새를 풍기고 다녔거든, 레이."


경음부실에서는 꽤 떨어진 복도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으로, 고요했다. 레오는 양팔을 허리에 얹었다.


"요즘은 토마토 냄새가 더 진하지만 말이야! 핫핫하☆"

"크크, 냄새를 흘려버렸구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하고 한참을 웃었다. 울리기 시작한 빗소리가 음산하게 섞였다. 그리고 천둥이 창문을 때리자, 약속한 듯이 웃음을 멈췄다.


"그런다고 죄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아. 알고 있잖아? 너도, 나도."


레오의 눈동자가 레이의 눈동자에 붉게 비쳤다.


-


 "이상하지 않습니까?"


츠카사, 아라시, 이즈미가 유메노사키의 여러 곳을 수색하고 돌아온 자리였다. 각자 찾아본 곳에 관해 의견을 나누던 도중, 츠카사가 말했다.


"어디가 이상한 거니, 츠카사쨩?"

"아뇨, place가 이상한 게 아니라, 어색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뭘 말하는 건데? 질질 끌면 짜증 나거든~?"

"그게……, Leader의 목소리가, 들리질 않아서."


아라시와 이즈미는 어리둥절하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게 이상하다고? 혹시 카사 군, 청력에 자신 있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Leader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Loud한 소리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소리는커녕, 말소리조차 들리질 않았습니다."

"흐응, 그래서… 결론은?"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좋아, 이의는 인정할게. 하지만 그걸로 끝나면 안 되겠지?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알겠어?"

"그것까진, 아직."


이즈미는 한숨을 쉬고는 팔짱을 꼈다. 


"그럼 다음부터는 해결책까지 생각한 뒤에 말해. 어울려주기 힘드니까."

"이즈미쨩, 후배를 너무 몰아세우면 나쁜 선배라구? 그리고, 덕분에 감잡지 않았어~?"


아라시의 말에 이즈미는 조금 투덜거리더니, 입을 닫았다. 오카마 후배주제에, 라고 중얼거린 것 같기도 했다. 아라시는 이즈미를 잠시 신경쓰다가 츠카사를 향했다.


"혼자보다는 여럿이서 생각하는 게 낫잖아? 머리를 모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그런데 나루카미 선배. 감을 잡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아~ 이즈미쨩은 수세에 몰릴 말은 잘 하지 않으니까. 만일 츠카사 쨩이 반론해도, 답을 준비하지 않았을까해서. 그렇지 않아?"

"남의 속을 그렇게 들여다 보면 짜증 난다고, 나루 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럼 세나 선배는 Leader에게 생긴 문제를 눈치챈 건가요!"

"쿠마 군을 찾았겠지."


츠카사와 아라시의 눈이 싸해졌다.


"……왜 그렇게 쳐다봐? 불만이라도?"

"세나 선배의 말대로라면, Leader는 리츠 선배를 빠르게 찾아냈다는 건데, 왜 연락을 하지 않은 거죠? 우리가 흩어진 것도, 효율적으로 리츠 선배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나요?"

"어쩌면, 우리를 흩어 놓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을지도 모르지."

"어째서 그런 짓을!"

"글쎄, 임금님의 안 좋은 버릇이 나온 걸지도."

"안 좋은 habit입니까?"

"이즈미쨩의 말대로면, 위험하지 않아?"

"그렇지. 우선 임금님이 어디에 있을지 알아내야 하는데, 그게 문제."


츠카사는 우선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오는 어디로 갔는가, 레오가 리츠를 찾았다면, 리츠는 어디에 있었는가. 레오의 좋지 않은 버릇과, 그의 목적. 단시간에 결론지어야 할 생각들이 어지럽게 섞였다. 모두가 고민에 고민을 이을 즈음, 츠카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경음부실에는 가보셨나요?"

"난 안 갔는데. 나루 군은?"

"나도 안 갔는걸. 그야, 경음부실에는……."

"리츠 선배의 형님이 계시죠."

"쿠마 군은, 일단은 자기 형을 싫어하고 말이지. 근처에도 안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그래도 형제입니다. 가장 먼저 기댈 상대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츠카사의 말에 아라시가 살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읏, 제가 틀린 말이라도…?"

"아아, 아니. 츠카사쨩, 아직 어리구나~ 싶어서. 형제도 없고. 나이가 들고 나면, 알게 되겠지만 말이야? 형제는 그렇게 쉽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냐."

"그렇……습니까?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개인차는 있겠지만 말이지? 지금 논쟁할 시간은 없으니까, 우선 츠카사쨩의 말대로, 경음부실에 갈까? 다들 안 가본 것 같고, 츠카사쨩이 열심히 생각해줬고♪"


이대로 이야기를 끝내기 아쉬운 듯 츠카사가 더 말하려고 하자, 아라시의 전화가 울렸다. 안즈의 연락이었다. 리츠의 집에도 마오의 집에도 리츠는 없었다. 그리고, 리츠의 집에는 레이도 없었다는 전언이었다. 츠카사의 눈이 반짝였다.


"연락 고마워, 안즈쨩. 이쪽도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았고… 아, 이제 이쪽으로 와줄래? 응, 알았어. 이따가 봐~."


아라시는 전화를 끊었다. 


"저, 누님은 왜 부르신 거죠?"

"그냥 보고 싶었던 거 아냐? 사심이 깊어, 나루 군."

"너무 추궁하지 말아줘~ 소녀의 마음은 복잡하니까~!"

"시끄러워. 급하니까 사담 금지."


이즈미는 곧바로 뛰어나갔다. 아라시와 츠카사도 뒤를 따랐다. 


"…나루카미 선배, 아까의 이야기말입니다만."

"응? 아아, 아깐 나도 감정이 조금 복잡했나봐.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아줘~."

"네, 그럴 생각입니다만…… 꼭, 형제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야?"

"항상 자신을 믿어달라고, 힘들 때면 기대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라면, 형제가 아니라도 찾아가게 될 겁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란,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아라시는 리츠에게 그 1순위가 레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리츠가 가장 의지했던 사람은 그의 소꿉친구인 이사라 마오였으니까. 사쿠마 리츠는 이사라 마오를 좋아했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 그 사실을 아는 아라시였기에, 츠카사의 말에 절반 정도는 동의했다. 단지 레이가 리츠에게 2순위였을 뿐이다. 레이가 이용해먹기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리츠가 경음부실에 있다면, 그의 형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면, 

리츠는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 걸까?


세 사람은 경음부실 앞의 복도에 섰다. 복도에는 주홍빛의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었고, 이상하게 시큼한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이즈미는 안쪽의 동태를 잠시 확인한 뒤, 곧바로 문을 열었다.

경음부실은 달빛 한 줄기가 내리쬘 뿐인, 적막에 감싸여 있었다. 빗소리가 내내 창문을 두드렸다. 그 중심에 놓인 관이, 조금씩 흔들린다.


"리츠 선배!"


츠카사가 황급히 뛰어가 관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달빛을 받아, 붉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는 사쿠마 레이가 있었다. 은은하기만 했던 달빛은 그에게 닿자마자 사람을 떨게 하는 몽환으로 변했다. 츠카사는 그 아름다움에 놀라, 뒤로 넘어졌다.


"……리츠가 아니라, 미안하구먼."

"흐이익?!"

"카사 군, 진정해!"

"진정했습니다! 리츠 선배의 머리가 길어졌을 뿐……!"

"형제라서 닮은 건 이해하지만, 리츠쨩의 형이라구!"

"아……!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보다, 좀 일으켜주지 않겠누? 힘이 다 빠져버려서 꼴이 말이 아니니."


츠카사는 레이의 팔을 잡아당겨 그를 일으켰다. 레이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눈을 질끈 감고서, 나이츠를 향해 단언했다.


"너희들의 왕이, 리츠를 데려갔다."

"저희가 올 때까지, 버틸 수는 없었던 겁니까?'"

"츠키나가 군은 일찍 찾아왔네. 나를 상대할 대책도 생각해둔 모양이었지. 나는, 형으로서의 자격이 없네. 리츠를 지켜줬어야 했는데, 리츠의 작은 부탁 하나 들어주질 못했어."

"당신이 우리 임금님한테 진 건 관심 없거든. 오히려 기쁜데. 그래서 우리네 임금님이 어디 갔는지는 알아?"

"이즈미 군은 냉정하구먼. 그래, 사과는 모든 일이 끝나고 해도 늦지 않겠지. 지금은 리츠를 구하는 게 급선무일세. 츠키나가 군이 어디로 가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예상은 하고 있네."

"그러니까 말하란 말이야, 이 할……!"


아라시가 이즈미의 입을 막았다.


"부탁합니다! 부디, Leader가 계신 place를!"

"그는, 계속해서 리츠는 자신의 Knights라고 말했네. Knights로서의 기사도를 가르쳐주겠다고도 말했지. 리츠가 계속 이 상태라면, Knights가 기우뚱하는 건 시간 문제일세. 츠키나가 군도 그걸 알고, 리츠의 마음을 돌리려 하겠지.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분명, Leader는 강단이 있다는 느낌이지만서도…… 대체 Leader가 뭘 한다는 겁니까?"

"그걸 알 수 없어 두렵네. 그가 달라지지 않았을지, 혹은 변했을지……. 일단, 츠키나가 군은 리츠를 Knights에 묶고자 하네. 그렇다면, Knights임을 자각할 수 있는 장소에, 리츠를 데려갔겠지."


세 사람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고, 동시에 읊조렸다. 


-


꿈을 꿨다. 마~군이, 무언가 계속 말하려 하고 있어. 나는 마~군에게 다가가려고 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아. 그래서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어. 그럼에도 마~군은 끊임없이, 나에게 닿길 바라면서, 울먹이고 있었어.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걸 버티면서, 내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내고 있었어. 아, 이제, 조금씩 들리는 것 같아. 마~군. 나 여기 있어. 리츠, 리, 츠, 릿…츠…?


"릿츠~! 아, 이제 정신이 들었나봐!"


사쿠마 리츠는 이상한 장소에서 눈을 떴다. 눈을 비비고 다시 둘러 보니, 이상한 장소는 아니었다. 이 곳은 Knights가 자주 모이곤 하는, 스테이지였다. 


"……마~군이 아니었네, 임금님."

"어랏, 혹시 실망했어? 유감이지만, 네 친구는 올 수 없어♪"

"아무리 임금님이라도, 지금 깨운 건 용서 못하겠어. 마~군이 말하는 걸 들어야 하니까, 깨우지 마."


리츠는 레오를 게슴츠레 째려봤다. 레오는 검지를 인중에 받치고는 리츠가 하는 행동들을 지켜보았다. 리츠는 스테이지의 위에서 몸을 말고 누웠다. 비가 내리는 밤은 쌀쌀했지만, 리츠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보였다.


"음, 좋아좋아! 인스피레이션이 솟아오르는걸! 사랑한다, 릿츠♪"

"조용히 해, 임금님."

"기다려, 곡을 적을 테니까! 명곡이 나올 거야! 이 곡은 말이야, 릿츠를 위한 곡이야. 이름은, 그래…… 망상장애가 좋을까?"


레오는 메모장에 곡을 적는데 열중했다.  리츠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 뭐하는 건데?"

"나중에 릿츠가 이 곡을 불러주면 좋겠는걸. 오오, 나중에 모두에게 한 곡씩 만들어줄까! 고유한 무기 같은 느낌도, 나쁘지 않아."

"임금님!!"


리츠가 소리쳤지만, 레오는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줘! 10분, 아니 1분, 아니 10초! 자, 이제 계속할까, 리츠?"

"이제 나가주면 안 될까? 여기서 잘 테니까."

"미안하지만, 릿츠. 아니, 미안할 일은 아닌가♪ 난 너를 방해하러 왔어."

"방해라니?"


리츠는 적대적인 눈빛으로 레오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종잡을 수 없으면서도, 평소와 다른 섬뜩함을 품은 레오의 모습에 리츠는 불안감을 느꼈다. 평소와는 달랐다. 이젠 그가 정말로 미쳐버린 건 아닌지 두려울 정도였다. 스테이지의 불빛은 침침했다. 익숙한 장소임에도, 리츠는 오한을 느꼈다. 그러나 낯설지는 않았다. 리츠는 그를 오래도록 지켜봤고, 그가 해왔던 일들, 그가 저질러왔던 죄를, 그 눈으로 기억했다. 리츠는 방관자였고, 레오는 집행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리츠가.


"자, 릿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잊어버리면 안 돼. 임금님의 명령이야♪"


그는 리츠를 보며 스스럼없이 웃었다. 군림하고자 하지는 않았으나, 자신도 모르게 도취하고 만다. 벌거벗은 임금님일 뿐이지만, 임금님이란 것을 느낀다. 무엇보다도 억눌러야 할 감정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리츠를 위해.


"네 친구는, 학교에 가다가, 릿츠를 깨우는 걸 깜빡해버렸어. 그 전날에 밤을 새버려서, 비몽사몽 나온 모양이야. 그래서 뒤로 돌아서, 릿츠의 집으로 가려고 했어. 그런데 하필, 네 친구는 횡단보도 위에 서 있었고,"

"그, 그만. 임금님. 그만해."

"그대로, 도로 오른쪽으로 꺾어들어오는 차에……."

"그만하라니까!"



       리츠는 레오를 제지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방금 일어난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지금은 달이 허락된 시간이었고, 리츠는 시계가 가리키는 숫자를 이제서야 보았다. 리츠는 자고 있지 않았다. 마오가 보이지 않게 된 뒤로, 현실에서 눈을 돌렸을 뿐이다. 리츠의 몸은 스스로가 생각한 이상으로 컨디션이 좋아서, 앓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레오의 멱살을 비틀 수 있었다.

레오의 충격 요법은 효과가 있었다. 리츠는 세상을 보아야 했다. 소중한 소꿉친구가 죽은지 며칠이 지났고, 그 원인에는 자신이 개입되어 있다. 자신은 소꿉친구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고, 현실을 부정한 채, 이렇게 처박혀 있었다. 분노할 대상은 레오가 아니었다. 

이사라 마오를 부정한 사쿠마 리츠다.


"릿츠, 이 손 놔."


레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거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리츠는 힘없이 팔을 떨구었다.


"네 친구 이사라 마오는……, 아. 이젠 내가 말할 필요도 없겠네. 그렇지?"

"임금님, 어째서야……."


리츠는 몸을 떨며 레오와 눈을 맞추었다. 이토록 뜨겁고 강렬한 감정을, 리츠에게서 느낀 적이 있었던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레오는 흥미를 느껴버렸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고!"


리츠는 절규했다. 이 순간에도 떠나버린 소꿉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어째서일까. 이런 거, 나답지 않은데. 마~군이 보면 놀랄 텐데. 이런 거, 원하지 않을 텐데.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다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서 좀 더 자고 싶었다. 이런 임금님은 보고 싶지도 않고,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마오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네가 부서지면, 모두를 지킬 수 있으니까."


그것이 임금님의 대답이었다. 그의 웃음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밝았다. 노이즈가 일었다. 이대로 부서져 버릴까. 이제는 없는 마 군과, 앞으로 살아갈 Knights. Knights는 마 군의 죽음에 애도를 표할 뿐, 그의 죽음 때문에 Knights의 활동이 위험하거나, 미래가 불투명해지지는 않는다. 

오직 나 때문이다. 내가 없다면, 내가 부서진다면, Knights는 달라지지 않는다. 임금님은, 이미 그렇게 했으니까. 불변을 위해 바스라졌으니까. 지금은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 

임금님이 원하는 것, Knights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마 군이 원하는 것. 

이젠, 모르겠어…….

선명하게 빗줄기를 비추는 달빛이, 어지럽다.



"여기입니까! Leader!"


츠카사가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현장은 놀랄 만큼 고요해서, 벽들이 끼어들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그의 뒤를 이어 이즈미가 들어왔다.


"곧 끝나는데, 무슨 일이야? 스오, 세나."


레오는 무신경하게 웃었다. 이즈미는 레오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Knights의 리더인 레오였고, Knights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던 레오였다. 그 시절의 레오와 다르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의 기시감이 이즈미의 손에 닿았다. 이 기시감을 어떻게 다룰지는 그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를 따를 것인가, 그에게 반할 것인가.


"……임금님, 이건 잘못 됐어."


이즈미는 레오의 팔을 붙잡았다. 리츠는 레오의 앞에 그저 서서,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이즈미는,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어라, 혹시 반역하는 거야?"

"이런 건 간언이라고 하는 거야."


이렇게 말해도, 자신도 과거를 방관해 왔던 사람이다. Knights에서 무너졌던 수많은 꿈들에게 용서를 구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이 녀석들만큼은 구하고 싶었다. 

벌거벗었음을 알아버린 왕은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왕국을 위해서라면 살갗까지 한 꺼풀 더 벗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왕이 망가질 뿐이다. 민중에겐 역겨울 뿐이다. 이 희생은 바른 게 아니야, 레오. 그러니까 나는 너를 막는다. 너는, 여기서 무너져도 좋을 폭군따위가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 쿠마 군을 Knights에 잡아둘 수 있을 리 없잖아. 현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쿠마 군이 Knights에 머무를 이유는 없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세나? 이건 심판이야"

"레오, 너……."

"유구한 전통이잖아?"


     레오는 이즈미를 뿌리쳤다. 그리고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자기혐오에 빠진 리츠의 어깨를 손날로 두드렸다.


"사쿠마 리츠. 너를 여기서, 기사왕이 심판한다."

"……누가 심판하겠다는 건데?"


불쾌한 금속음이 났다. 리츠는 레오를 밀치고, 손에 든 십자가 모양의 송곳을 자신의 턱끝에 가져다댔다. 금방이라도 그의 턱을 꿰뚫을 송곳이 흔들렸다.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이걸 바라진 않을 테지만, 임금님."

"릿츠, 기다려!"

"날 심판하는 건 나야. 네 손에 맡길 리가 없지."


레오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영감으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재가 될 한 소년의 끝이 여기에 있었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의 눈에 리츠는 마치  태양빛을 받아 스스로 타오르는, 결의와도 같았다.  


"지금 갈 테니까, 마 군."


리츠의 몸뚱아리가 나가떨어졌다. 

츠카사는 몸을 날려 리츠의 자살을 저지했다. 둘의 몸이 뒤엉켜 쓰러졌다. 츠카사는 쓰러진 리츠가 어지러워하는 사이 그의 손에 들린 송곳을 쳐내고, 리츠의 멱살을 잡았다.


"감정에 휘둘려 생명을 하찮게 여기다니, Knights로서의 자각이 있는 겁니까!"

"Knights로서의 자각? 아하하,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 스 쨩."

"Knights잖아요! 당신도, 엄연한 기사입니다!"

"……임금님 덕분에, 결정했어. 난 탈퇴할 거야. 이런 학원, 다닐 이유도 없어. 이젠, 살아갈 이유도 없어."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죄다 Crazy man이군요……!"


츠카사는 화가 잔뜩 나서는 레오를 째려봤다. 그제서 정신을 차린 레오가 시선을 피했다. 

"어떻게 해야 돌아올 건가요, 리츠 선배? 당신이 없다면, Knights는, 날개를 잃습니다. 리츠 선배는 중요한 전력이에요." 

"그건 알아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날 내쫓으려 한 건 임금님이고."

"Leader가 어떻게 생각하든, 저는 반대입니다."

"많이 컸네, 스~쨩."


리츠는 츠카사의 손을 떨궈내고 일어섰다. 츠카사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선배들 덕분입니다."

"하지만 임금님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할 거야? 날 지켜서 싸우기라도 할 거야? 아니면 반대로 임금님을 쫓아낼 셈?"

"그, 그건."

"이제부터 생각하면 되는 게야."


모두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안즈와 아라시의 부축을 받아 레이가 걸어 오고 있었다. 


"저지먼트라면, 꼭 지금이 아니어도 되네. 츠키나가 군은 리츠의 혼을, 아이돌로서의 꿈을 저지먼트로 깨닫게 해주고 싶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상상 이상으로 그 아이에겐 이사라 군이 소중했던 게지."

"왜 형님이 떠들고 있는 거야? 형님의 입에서 마~군의 이름을 듣고 싶지 않은데."

"리츠야. 네겐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위험한 일은 생각하지 않도록 하자. 츠키나가 군이 저지먼트를 선언한 이상, 실행해야 하지 않겠나. 나중에 시간을 잡아, 제대로 실행하는 건 어떤가?"

"난 이 학원을 나갈 거야. 필요 없다고."

"리츠 쨩,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생각을……."


리츠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Knights가 있어도! 홍차부가 있어도! 유메노사키의… 모두가 있어도…… 응? 마 군은, 내가 없으면 안 돼. 어디에 있든지, 마 군이 없는데 뭐가 긍지야, 뭐가 기사야! 나는 다른 멤버들처럼 그런 거에 쓸 힘도 없고, 임금님처럼 희생할 자신따위도 없어! 난 저지먼트에 참가하지 않을 거야. 내가 저지먼트에서 승리하면, 자연스럽게 Knights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임금님? 미안하지만, 난 저지먼트에 참여하지 않을 거야. 이 학원도, 곧 떠날 거야."


리츠의 외침에,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리츠도 목이 나가라 소리치는 자신이 낯설었다. 이렇게 목이 메고,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데도, 마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

리츠는 다음날 마오의 장례식에 들렀다. 마오의 어머니는 리츠를 끌어안고 우셨다. 자신을 원망할 거라고 생각했던 리츠도,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제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마오의 표정이, 어색할 정도로 밝다.


"……릿군, 뭐하는 거야?"


리츠는 유메노사키의 옥상에 섰다. 학원은 여전히 조용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운동장이 넓었다. 리츠는 난간에 기대어서 한숨을 쉬었다.


"있지, 마~군.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되지?"

"뭐라는 거야. 릿군은 항상 내가 챙겨주고 있잖아?"

"헤에, 잘도 그런 말을 하네……. 내가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주제에."

"그런 거 아니거든. 그래서, 지금부터 뭘 할 거야?"

"글쎄…… 굳이 말하자면, 퇴학식?"


리츠는 난간을 넘어갔다. 난간을 넘어서면, 발끝이 허공에 남을 만큼의 공간이 있다. 차게 흐르는 바람이 신경을 찌릿하게 자극했다. 돌아보면,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기억에, 마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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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세메터리

,

리츠마오의... 그것...

2016. 2. 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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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가와라 코시



  연습 시합 일정이 잡혔다.

  상대 고교는 유명한 팀은 아니었다. 최근 부활하고 있는 카라스노와 대결해보기 위해 연습 시합을 신청하고 있는 고교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팀들과 여러 번 겨루었었다. 그들이 약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배구공을 쥐고 있는 사람은 모두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 눈앞의 적을 쓰러뜨린다. 다음 경기로 나아간다. 상대의 1점을 끊는다. 단 1점이라도 성공시킨다.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약체라고 비웃을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 마음가짐이 없는 배구부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패배 역시 특별한 일은 아니다. 공을 떨어뜨리면 지는 스포츠가 배구라지만, 공을 떨어뜨리지 않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을 잡겠다는 마음이기에, 그런 마음이 좀 더 절실한 쪽이 승리한다.


"스가, 낙심하지 마라."

"……미안."

"미안할 거 없어. 점수 차도 아슬아슬하고, 실력차도 크게 나지 않았잖아."

"그, 그래 스가. 어차피 연습 시합이고. 우리 컨디션도 안 좋았고. 그, 그렇지?"


  스트레이트로 승리를 따낸 상대 고교가 의기양양하게 돌아간 뒤, 나는 체육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카게야마는 코트에 없었다. 그날따라 몸상태가 안 좋았던 모양인지, 벤치에서도 화장실을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돌아가 쉬는 게 어떻냐고 권유했을 때도 카게야마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벤치에 남았다. 좋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상대팀의 세터에게서, 그리고 이런 나에게서라도 무언가를 배우려는 자세는.

  

  상대방이 내려친 공은 자국을 남긴다. 보이지는 않지만, 다음 번엔 저곳은 반드시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마음의 자국. 그리고 그 공이 마지막 득점이 되었을 때, 패배자들에게 남는 쓰라린 상처.


  내가 이어준 공이, 제대로 하늘에 닿지 못했을 때의 자괴감. 콤비네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초조함. 동료들의 믿음에 보답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배신감. 차갑게만 느껴지는 감정들이 메아리쳐서, 골수가 얼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상처를 계속 헤집었다.


  코치님은 오랜만에 주전으로 출장하는 나를 위해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부원들을 위주로 경기를 구성하셨다. 나는 이 멤버라면, 긴장하지 않고 제대로 실력을 보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리였다. 긴장하고 긴장해서, 나는 공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두 세트를 뛴다는 흥분감이나 계속되는 실점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코트에 서고 싶다.


  


-


2. 주전


  











  




 


WRITTEN BY
세메터리

,


  도서관은 눈을 빛냈다.


  어둠이 희미하게 내리쬐는 거리엔 불빛 사이로 언뜻언뜻 눈발이 휘날렸다. 도서관은 일찌감치 닫혔을 시간이었다. 사서도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고, 경비 아저씨는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멍하니 점멸등을 주시하는 사이, 도서관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땠어?"

"이쪽 줄은 여전히 사람이 드문걸."

"도서관에서까지 정치책을 읽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정치인들한테 너무하시네요!"


  우리에겐 들리지 않지만 그들은 분명히 떠들고 있다. 활자의 웃음이다. 손때가 묻어 표지가 너덜너덜해진 책부터 어제 들어온 신간까지 왁자지껄 내키는 대로 검은 침을 묻히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도서관이다.


"어제 있잖아, 코묻은 남자애가 막 이쪽으로 손을 뻗는 거 있지? 닿으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했다니까!"


  가장 높은 곳에 꽂힌 인터넷 소설이 말했다. 그녀는 가장 수다스러운 책중의 한 권이다. 그 열에 꽂힌 책들은 판타지 소설이나 인터넷 소설 등, 순수 문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책들이다. 그런 만큼 사람들의 때가 타 있기도 했다. 이들은 사람 사는 이야기에 환상을 집어넣는다. 조곤조곤 자기들이 본 풍경을 이야기하는 수필들과는 달리 이들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상상의 나래를 등에 심어 넣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몇 년 지나면 걔도 키가 훌쩍 크겠네?"

"그렇겠지? 그때면 우리는 완전 고서고!"

"아유, 그런 얘기는 하지도 마라 얘!"

"태워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들은 그나마 사람이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기다. 다른 고전 문학이나, 인문학 도서들은 눈으로 읽어도 잠이 오는 이야기를 입으로 떠들기 때문에, 굳이 감기는 눈을 벌리면서까지 그들을 찾아볼 필요성은 없을 것이다.


  책들이 기다리는 것은 신간이다. 책들이 아는 것은 자기들이 담고 있는 것과 이 도서관 안에서 보이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세상사를 담고 들어오는 신간들이 주목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여어, 신입. 어제 들어왔다지?"

"예, 옛! 어제 까만 딱지 붙였습니다!"

"뭐야, 소설이야? 시사는 없냐?"

"이, 이번엔 소설만 입고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거 실망이구만. 요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 궁금했는데."

"뭐가 그리 궁금하우.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지."


  표지가 낡아빠진 고전 소설 두 권이었다. 이 두 권은, 내일이면 이 도서관을 떠나게 된다. 인기도 많은 편은 아니지만, 최근 새롭게 번역한 같은 내용의 책이 출판되어 이 도서관도 신간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너구나, 이번에 새로 들어온 녀석이."

"아, 예."

"우리 손주 보는 거 같아서 괜히 좋구먼."

"이 사람아, 좋긴 뭐가 좋아? 이 녀석들이 우리 자리 채가는 거 아녀!"

"뭘 그리 화내고 그래요. 사람이 돌고 돌듯 책도 돌고 도는 거지."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뭐야?"

"두 분은 여기 언제부터 계셨나요?"


  신간 X의 질문이었다. 구간 X가 신간 X를 째려보자 구간 Y가 구간 X를 제지했다. 어떻게 제지했냐고 물으시냐면, 예전에 책갈피로 쓰곤 했던 책의 머리 꽁지로 제지했다고 하자. 구간 X와 Y의 종이는 누렇게 물들었지만, 신간 X는 매끄러운 검은 겉표지와 새하얀 종이가 대비되어 굉장히 세련된 인상을 주었다. 신간 Y는 파릇파릇한 느낌의 일러스트가 표지에 새겨진 새하얀 소설책이었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검은 양복을 입은 새하얀 피부의 소년과 하늘하늘한 순백의 드레스를 몸에 걸친 역시나 하얀 피부의 소녀였다. 


  신간 X는 호기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구간 Y는 그 모습이 과거의 구간 X를 빼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옷을 새로 빼입어도, 내용물은 같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구간 X의 반응은 어쩌면 일종의 동족 혐오인지도 몰랐다.


"글쎄다, 적어도 10년은 넘었을 게다."

"우와, 10년이요? 그렇게 오래 있을 수도 있어요?"

"예전에는 그랬지. 요즘에는 책이 워낙 많이 나오고 빨리 바뀌고 하지만 말이다."

"그 1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나요?"


  신간 Y의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구간 X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구간 Y의 눈총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흠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릴 빌려갔지. 지금은 대통령이 된 소년부터 장관이 된 누구누구까지~"

"그 애들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우리가 어떻게 아우? 하여튼 허풍하고는."

"허풍은 무슨 허풍이야! 우리가 어디어디 대학 100선에는 못들어가도, 어엿한 고전이란 말이지. 원래 사람은 고전을 읽어야 사람이 되는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저희가 이렇게 새로 출판될 일도 없잖아요."


  구간 X의 말을 신간 X가 거들었다. 같은 내용의 책이라 죽이 잘 맞는 건지, 신간이 구간의 비위를 맞춰준 건지 알아볼 길은 없다.


"그럼 두 분은 이제 어떻게 되시는 거예요?"


  신간 Y의 천진난만한 질문에, 구간 X와 Y는 당황했다. 뻔한 일이었다. 중고 서적으로 다른 곳에 넘겨지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낱장으로 분해되어 다른 것으로 재사용되거나, 혹은 불태워질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 될지 장담할 수 없었기에, X와 Y는 그 질문에 대답해줄 수 없었다.


"바보야. 당연히 새단장을 하는 게 당연하잖아."

"새단장?"

"그래. 두 분은 이제 옷을 새로 입고, 어쩌면 내용도 다시 가다듬어서, 새로운 책이 될지도 몰라."

"우와, 그건… 멋지다!"


  신간 X의 말은 구간 X와 Y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누렇게 뜬 자신들이 새로운 책이 된다? 요즘 기술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자신들을 그렇게까지 재활용해줄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쓰는 게 미덕이 된 지금, 자신들을 다시 책다운 책으로 사용해 줄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그럼 두 분은 나중에 어떤 책이 되고 싶으세요?"


  신간 Y의 질문이 이어졌다. 구간 X와 Y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이루어지지 못해도 꿈꾸는 것은 허락될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나는 성공한 사람의 수기집이 좋겠다!"


  구간 X가 말했다.


"또 주책이요?"


  구간 Y가 옆에서 옆구리를 찔러댔다.


"주책이 아니라니까! 이게 바로 로망이라는 거지! 요즘 베스트 셀러라고 하는 책들은, 거의 그런 책이라고! 사람들은 성공하고 싶어서 성공한 사람들을 베낀단 말이지. 그런 책들 안에는 다 그럴 듯해 보이는 것들을 가득 채우는 게 당연지사지! 나도 이왕이면 희망 같은 것만 말해 보고 싶어!"

"하긴 저희 내용은 우중충하니까말이죠."

"그래서 네 표지도 까만 거냐?"

"그런가 봐요!"


  서로 만담을 나누는 X들을 무시하고, 구간 Y가 말을 이었다.


"난 새파란 애들이 사랑을 하는 그런 책이 되고 싶구나. 로맨스라고 하던가? 그런 것 말이지."

"하지만 저희도 사랑 얘기가 많지 않아요?"

"우리가 품고 있는 건 옛날 귀족들이 하하호호하는 것들이잖니. 요즘의 자유로운 연애를 품고 싶구나."

"좋네요! 어떤 시대든 간에 사랑은 소중한 거지만요!"

"위대하기도 하지!"


  분위기는 어느새 화기애애해졌다. 따뜻한 바람 하나 나오지 않는 도서관이었지만, 분위기만큼은 벽난로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손녀였다. 


  내일이면 이 아이들을 못본다는 사실에 구간 X와 Y는 침울해졌다. 잠깐 사이에 얼마나 정이 붙었던 건지, 때 하나 타지 않은 이들의 모습이 눈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12시간 후면 이 도서관을 떠난다.


  신간 X와 Y는 잠들어버렸다.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던 구간 X와 Y는 이따금 눈이 치는 창문을 바라봤다.


"지금 기분이 어때요?"

"말도 마. 당장 베스트 셀러라도 된 기분이야."

"호호, 내일 운명도 모르는 사람이."

"어찌 됐든 간에, 모든 책들에게 기다리는 운명이잖나. 난 지난 10년간을 후회하지도 않아. 많은 사람들에게 익히고 그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많은 교훈을 줬다고 생각해."

"하지만,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는요?"

"그건 이 아이들이 해주겠지."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살아 가는 거나 다름이 없군요."


  성탄 불빛이 거리를 메웠다. 인적이 뜸해진 거리는 조용했다. 새하얀 음표들이 바람에 날렸다. 징글벨, 징글벨…… 무인 라디오에서 울리는 노래가 눈을 부르는 것마냥, 노랫소리가 점점 작아질 수록 눈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밤하늘은 포근했다. 부디, 살아 있는 이들에게 어떤 축복이 내려지기를. 별들은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WRITTEN BY
세메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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