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과는 새로운 전학생을 받았다. 최초로 프로듀서과에 입학한 학생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선보인 관계로, 시험 삼아 학기 중에 전학오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자, 과연 소문을 듣고 전학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한 명의 프로듀서가 모든 유닛의 프로듀스를 전담할 수는 없기에, 전학생들은 프로듀서과의 교육 하에 한 유닛을 담당하는 형식으로 프로듀스를 시작했다. 프로듀서의 선택과 유닛의 승인이 있다면 프로듀스 계약이 성립한다. 

비록 패배하긴 했으나, 여전히 학원 굴지의 유닛인 fine에는 많은 프로듀서들이 몰려들었다. DDD에서 승리한 유닛인 Trickstar는 이미 첫번째 전학생이 프로듀스하고 있으니, 그에 비견되는 학원 굴지의 유닛을 프로듀스하고 싶다는 마음 탓일 것이다. 그런 연유로, 학생회장이자 fine의 리더인 텐쇼인 에이치와, fine 소속의 후시미 유즈루가 프로듀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이 말은 즉, 텐쇼인 에이치가 본인의 손으로, 자신들의 프로듀서를 뽑았다는 의미였다.


"……신뢰입니다."


텐쇼인 에이치는 프로듀서로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그녀는 당연한 듯이 이렇게 말했다. 에이치는 이 단어에서 여러 관계를 유추해냈다. 프로듀서와 유닛과의 신뢰가 먼저일 것이고, 유닛 멤버 간의 신뢰도 단연 중요하다. 그리고 아이돌과 팬 사이의 신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속성이다.

레슨 능력, 지식, 사랑 등 탐탁치 않은 답변 사이에서는 그나마, 이 답변이 fine의 리더의 마음에 들었다. 그도 Trickstar와의 싸움에서 느낀 것이 있기에, 어쩌면 그녀가 fine에 없던 신뢰라는 것을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텐쇼인 에이치는 후일 절망하게 된다. 차라리 자신의 말대로 움직이는, 인형을 골라냈어야 한다고.


-


fine는 1학기에 비해 더욱 성장했다. 새롭게 들어온 프로듀서는 과연 유능했고, 끊임없이 fine의 성장을 촉진했다. 그 성장을 바라본 사람들은 프로듀서의 능력을 칭찬함과 동시에, 텐쇼인 에이치의 선구안을 부러워했다. 

fine의 프로듀서, 쿠로미네 미카미는 평소에는 딱딱한 인상이지만 업무에는 열성적이며, 책임감 있게 유닛을 프로듀스해왔다. 가끔 기이한 행동을 했으나, fine에는 히비키 와타루가 있었다. 재능에 잇따르는 기행 정도는 fine와 그들의 팬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fine는 서서히 그들의 프로듀서에게 마음을 열었다. 학생회의 일을 돕거나, 함께 티타임을 가지며 쉬거나, 에이치의 병문안을 가거나 하며, 그들은 프로듀서와의 신뢰를 느꼈다. 

에이치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프로듀스 관련으로만 그녀와 대화를 하던 에이치는 어느새 좋아하는 음식에 관해, 그녀의 행동에 관해, 자신의 상태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어떠한 섬뜩함도 느끼지 못한 것은 에이치의 실책이었을 따름이다. 

그 텐쇼인 에이치가 아무 것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프로듀서의 애정은 보기와는 다르게 각별했다. 에이치의 몸 상태에 따라 수시로 바뀌고는 하는 fine의 일정을 세심하게 조정해왔다. 마치 언제 에이치가 아프고, 언제쯤 낫는지를 아는 것처럼. 단순한 의료적 통계만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그녀의 능력을 다시금 평가했지만 에이치는 모종의 불안을 느꼈다. 그러나 잘 움직이고 있는 유닛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꾹꾹 담아두었던 것이다. 

역시, 그래서는 안 됐다.


어째선지 꾸준히 활동하던 fine가 활동을 멈추는 주간이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에이치의 입원이었고, 프로듀서가 바빠서라는 말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 fine의 프로듀서이니 멤버들을 배려해 휴식기를 준 것일 거라고 이해했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이 둘 있었다. 

프로듀서 본인인 쿠로미네 미카미와 텐쇼인 에이치는 활동 정지의 이유를 안다. 그 이유는 아주 사적이었고, 폐쇄적이어야 했기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미카미가 움직이기 시작한 때는 그녀와 fine가 "우리는 서로 신뢰하고 있다"고 느낄 때, 정확히는 믿을 때부터였다.


에이치는 하지메가 돌아간 가든 테라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가든 테라스는 에이치에게 있어 심신을 안정시키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찻잔은 하지메가 가지런히 정리해두었다.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가든 테라스의 문이 열렸다.


"텐쇼인 선배, 계세요?"


에이치는 눈을 돌렸다. 미카미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자, 에이치는 표정을 풀며 그녀를 맞았다.


"날 찾아 온 거야? 그래, 무슨 일이야?"


     미카미는 일직선으로 에이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에이치는 홍차부의 활동에 자주 참여했던 미카미이니, 이 주변이 익숙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조금은 풍경을 즐겨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움이 남았다. 

일거리 때문이라면 전화도 괜찮은데. 에이치는 그렇게 착각하며 일어서려 했다. 툭, 그의 다리와 그녀의 다리가 맞닿았다. 에이치는 일어나지 못했다. 에이치가 고개를 들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에이치는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그녀는 에이치의 시선을 보았다. 


드르륵, 삭막한 소리가 가든 테라스의 적막을 비로소 그었다. 적막은 붉게 일그러졌고, 텐쇼인 에이치는 붉게 젖었다. 


에이치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숨을 멈추었다. 졸음처럼 밀려오는 아찔함이 이대로 의자에 등을 기대라며 재촉하는 듯 했다. 그는 의자의 팔받침을 잡았다. 살짝 물러선 미카미와의 틈으로 비척비척 벗어나서는 구급상자에 손을 뻗었다. 익숙하게 붕대와 소독약을 찾아낸 그는 미카미의 손목을 잡았다. 상처는 아주 가는 일직선이었지만 피가 끊이지 않고 솟아나왔다. 힘이 약했는지 지혈이 오래 걸렸고, 미카미의 손목에는 붕대가 감겼다. 


"……미카미쨩."

"네, 선배."


왜 그랬어? 라는 말을 씹어삼켰다.


"……이번주는 쉬자."

"네."

그날 에이치는 스트레스로 입원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누군가는 과일 바구니를 두고 갔다. 에이치는 이따금 구역질을 했다. 팔에는 수액을 꽂고 있어 움직일 수 없으니, 비상용으로 팔이 닿는 거리에 비닐봉지를 달아두었다. 실제로 무언가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에이치 자신은 기억이라도 뱉어낸다는 심정으로 구역질을 해댔다. 

그녀의 피는 진했다. 묽고, 척 봐도 건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자신의 것과는 달랐다. 자기 관리의 산물이라는 거겠지. 에이치는 여전히 그 피에서 사고를 떨어뜨릴 수 없었기에, 차라리 그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에이치에게 가장 두려울 사고는, 그것의 부차물일 것이었기에. 

그가 잠시 진정하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텐쇼인 선배."


그녀였다. 사실 에이치는, 그가 지금까지 보고 경험하고 맡았던 것이 한낱 꿈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손목에 감긴 붕대를 본 순간 박살나버렸을 뿐. 

그래도, 안심하고 있었다. 병원에 흉기를 들고 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여기서 그녀가 다시 손목을 긋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목적은 작은 사과와, 선물로 이루어진 병문안이겠지. 에이치는 애써 표정을 폈다. 

그녀는 텐쇼인 에이치의 시선을 보았다. 그것을 느낀 에이치는 본능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그녀의 눈에는 분명 동경이 담겨있을 텐데도. 

그녀는 여전히 동경을 담고,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쥔다. 손가락을 죈다. 그녀의 목에서 탄식이 꾸역꾸역 솟아오른다. 충혈되어 간다. 


에이치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몸을 일으키면 수액의 바늘이 빠질 것이고, 자신의 팔에서 피가 흐를 것이고, 삽시간에 자신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간호사를 부를 것이다. 간호사는 언제든 신속히 달려온다. 하지만 간호사를 부른다면? 그녀는 분명히 끌려간다. 자신이 없는 fine를 이끌어줄, 프로듀서가 사라진다. 그녀라는 프로듀서를 뽑은 실책이 드러나고 만다. 


사랑스러운 악마야, 너는 벌레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구나. 


에이치는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를 집어, 가능한 한, 있는 힘껏, 그녀를 향해 던졌다. 동공이 뒤집히려 하는 그녀는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이마에 사과를 얻어맞고 나동그라진다. 


     그녀가 쓰러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에이치는 아주,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이대로 그녀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도 알지 못하게, 은밀히 사용인을 부를까? 지금 그녀의 상태는 좋지 않아. 내 쪽에서 먼저 안정을 취하게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지금 여기서, 그녀를…….

미카미가 몸을 일으켰다. 조금은 놀란 듯, 머리를 감쌌지만 이상은 없어 보였다. 


"미카미쨩?"

"……네, 선배. 그런데,"


미카미는 팔을 떨며 시선을 피하는 에이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침대 위에 손을 올리고, 에이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는 바퀴벌레가 아니에요."


에이치는 몸을 떨었다. 식은 땀을 흘렸다. 


"…무슨 말일까, 미카미쨩. 놀라서… 말리려던 것 뿐이야."

"몸도 안 좋으신데, 푹 쉬셔야죠."

"아하하, 날 걱정해줘도 괜찮은 거야?"

"걱정해드리려고 왔으니까요."


공포스럽기까지만 했던 조금 전까지는 달리, 그녀는 평소와 다름 없는 상태로 말했다. 에이치는 휘말리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금 불쾌하기도 하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녀의 행동은 이상했다. 손목을 긋고, 자신의 목을 조르며 자신을 해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관리하는 유닛의 리더의 앞에서였다. 에이치는 그녀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에이치는 그녀를 신뢰했고, 그녀 역시 에이치를 신뢰하고 있을 테니까. 


"……미카미쨩. 혹시, 걱정이 있다면. 마음 놓고 말해도 좋아. 우리는 서로를 돕는 관계이기도 하니까, 너만 괜찮다면 이야기를 들을 시간을 낼게. 퇴원은, 금세 할 테니까."


미카미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에이치는 그녀의 눈에 달콤함을 보았지만, 정체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 감정은 그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그때 봐요, 선배."


     이 병실에는 거울이 없었다. 에이치는, 이 날 자신의 표정을 전혀 볼 수 없었을 것이고, 미카미는 그의 모든 표정을 보았다. 


-


     에이치가 퇴원하고, fine의 활동은 정상적으로 재개되었다. 에이치는 레슨이 끝나는 시간마다 가든 테라스로 미카미를 불렀다. 

자해의 이유를 직접 물어야 할까,  천천히 이야기를 끌어내야 할까? 에이치로서도 천천히 다가가야 하는 고민이었다. 지금껏 자신이 해왔던 싸우고, 쓰러뜨리고, 짓밟는 사투가 아닌, 신뢰하는 이들 간의 밀고 당기기는 에이치에겐 낯선 싸움이었으리라. 그러나 해내고 싶었다. 그는 말해주고 싶었다. 살아가도 된다고. 어떠한 죄를 품고 있다고 해도, 살아 있는 것에, 결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에이치는 그런 소망을 담아 미카미에게 다가간다. 신뢰의 끈이 서로의 마음을 잇고, 희망을 전하는 차의 향기가 가든 테라스를 가득 채우는 날이, 이어져 간다. 그녀가 에이치의 눈을 바라보며 웃는 날이 계속되었고, 그녀는 자해를 멈추었다.

 

어느덧 에이치는 만족하면서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해를 멈추었으니, 이 티타임도 멈춰야 하나? 아니, 이 티타임이 그녀를 잡아주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 티타임이 끝나면, 그녀 역시 시작할지도 모른다……, 라며, 그녀의 미소에 익숙해진 에이치는 소중한 시간을 붙잡는다. 

당초의 약속은 미카미가 자해를 멈추게 돕는 정도였지만, 에이치는 그녀에게 티타임을 계속하자고 제안할 생각이었다. 오늘로 끝나야 하는 이 시간을, 좀더 잡아끌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새롭게 변할 시간에 기대하며, 무대에 선 듯, 어쩌면 그것과는 다른 감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든 테라스의 문이 열린다. 언제나의 시간처럼, 그녀는 얼굴을 보였다. 에이치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 역시, 에이치의 눈을 보았다. 그녀는, 심히 만족스러워보였다.

미카미는 자신이 열었던 문을, 등으로 밀어 닫았다. 그 자리에서 멈춘 그녀를 에이치는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매에서 익숙한 것을 손에 쥐었다.  

에이치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서고 말았고, 

미카미는, 지체 없이 손목을 그었다. 


"……아아."


에이치는 크게 탄식했다. 


"미카미쨩, 어째서야?"

"뭘 묻는 건가요, 선배?"

"지금의……, 아니, 처음부터의 일들을."

"정확히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답니다, 선배."

"네가 어지른 게 보이지 않아?!"


에이치는 소리를 지른다. 미카미는 자신의 손목으로 살짝 시선을 옮기고, 다시 에이치를 보았다.


"이걸 말하는 건가요?"


에이치는 그것이라고 단언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지른 건 그 이상이었고, 그것은 미카미로서는 볼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널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아주 큰 착각이었던 모양이야."


그는 간신히 서 있는 듯한 모양으로 벽을 짚었다. 숨이 가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아, 이건 모순이구나.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나를 의지한다고 생각했는데, 주제넘은 생각이었구나. 혼자서, 행복하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놓고 말았어. 너는 여전히 악의로구나. 내게, 무얼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그는 손을 놓고는, 가든 테라스를 천천히 걸어다녔다. 미카미에게서 튄 피가 그의 신발 바닥에  닿았다.


"혹시, 내게 죽음의 공포를 알려주고 싶었어? 그 정도는, 항상 느끼고 있었지만 말이야. 아니면, 내가 이곳에서 저지른 죄악을 심판하고 싶었을까? 후후, 나는, 이미 유랑하는 황제야. 시체를 물어뜯고 싶었던 거라면 이해할게."


점점 모여드는 피가 웅덩이를 만드는데도, 에이치는 그 위를 걸어온다. 그는 그녀 앞에 선다.


"역시, 모르겠어."

"무얼 말인가요?"

"네가 나에게 웃어준 이유."

"그리고요?"

"네가 손목을 그은 이유, 항상 내 앞에서만 그래왔던 이유, 이제서야 나를 배신한 이유……."


순수했던 피웅덩이에 불순물이 섞여들었다. 점점 투명하게, 한 방울 두 방울이 붉게 파장을 뿜었다.


"나를 싫어하는 이유 말이야……."


에이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아뇨, 선배. 좋아해요."


미카미는 고개를 숙인 에이치를 끌어 안았다. 에이치가 천천히 손을 떼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선배의 그 표정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녀는 에이치가 자신의 얼굴을 숨기지 못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계속, 보게 해주세요."



 


WRITTEN BY
세메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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