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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똑.

토모야는 문을 노크했다. 문 옆에는 제대로 초인종도 붙었고, 전자 도어락도 달린 평범한 문이었지만, 그라면 이 쪽을 좋아할 것 같았다. 그 히비키 와타루의 집이라기엔 입구부터 평범했다. 자신의 집과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토모야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천장과 바닥이 뒤집혀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오오, 토모야 군! 역시 놀라울 것 없이, 시간에 맞춰 오셨군요!"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야? 변태 가면."

  

와타루가 졸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유메노사키에 신입생이 들어오기 전인 봄방학이었고, 토모야는 곧 2학년이 된다. 와타루는 졸업하고 나서 소식이 없었는데, 개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갑작스레 토모야에게 연락을 해왔다. 


"토모야 군도 만나자마자 그렇게 대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저는 가면을 쓰지 않았는데도요!"

"변태 가면이 변태 가면이지, 그럼 뭐라고 부르란 말이야?"

"어쩜 1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는지!"

"됐고, 호쿠토 선배는 일이 바빠서 못 온다고 했어."


언제나의 그처럼 화려한 포즈를 지으며 웃던 와타루는 돌연 움직임을 멈추고, 턱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라면 일이 바쁠만도 하지요. 그도 이제 어엿한 유메노사키의 최고 학년이니 말이죠."

"1년이 지나니까 더 멋있어졌어. 나도 일이 있으면 안 오고 마는 건데, 우리는 아직 정비기야."


멤버가 전원 3학년이 된 트릭스타는 강력한 유닛으로 거듭났다. 3학년들이 졸업한 다른 유닛에 비해 방학에 일감이 많이 들어와서 눈코뜰새 없이 바빠졌고, 그러면서 그들은 점점 강해질 터였다. 반면에 라빗츠는 아직 나즈나가 빈 자리가 허전하기만 했다. 개개인의 기량은 확연히 늘어났지만, 이 기량을 조율하는 건 스스로의 몫이 됐다.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신입을 받을 때까지는.


"그래도 핑계를 대지 않고 와주셨군요! 호쿠토 군의 부재는 예상했습니다. 물론 토모야 군이 오리라는 것도! 자, 들어오시죠. 히비키 와타루 유일의 처소에."


와타루는 토모야를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토모야는 평범하게 신발을 벗고, 실례합니다, 라고 말하며 와타루의 집에 들어섰다. 평범한 복도였다. 방들이 평범하게 복도를 두고 이어졌고, 어디 하나 이상한 점이 없었다. 그야말로 사람이 살 법한 집이었다. 


"토모야 군, 신경쓰이는 점이라도?"

"아, 아뇨. 혹시 남의 집에 들어온 건 아닌가 싶어서."

"이 집이 히비키 와타루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인가요?"

"그, 그건… 아니겠지만……."

"아뇨, 맞습니다! 이 곳은 엄밀히 말하자면, 저의 집은 아니지요. 저의 소중한, 가족의 집이랍니다."

"놀랐잖아. 난 가택침입이라도 한 줄 알았어."

"후후후, 범죄는 저지르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길."


와타루는 토모야를 거실로 안내했다. 거실 역시 이상한 점 없이, 안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등을 기댈 푹신한 소파, 바닥에 깔아둔 부드러운 깔개, 추우면 몸을 덮을 이불까지 부족한 것이 없었다. TV와 앉는 곳까지의 거리까지도 적당해서, 이 거실이 영화 시청을 위해 설계된 것처럼 느껴졌다.

와타루가 토모야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함께 영화를 한 편 보기 위해서였다. 평소에도 영화를 자주 보는 두 사람이었지만, 와타루가 토모야를 불러서, 함께 보자고 한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와타루가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토모야는 놀라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걱정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일정을 취소하고서라도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토모야는 와타루가 간식 거리를 준비해 오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집을 구경시켜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와타루가 토모야를 부른 이유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한번 온 곳에 다시 못 오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다음에 와타루의 가족을 만나, 함께 저녁을 먹으며 집을 소개해달라고 하자. 토모야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와타루를 상상하며 웃었다. 

그런데, 지금은 부모님이 안 계신 건가? 거실 외의 방은 모두 불이 꺼진 상태였다. 토모야가 올 때까지 와타루는 혼자 있었던 셈이 된다. 조금 일찍 올걸. 토모야는 살짝 후회했다.


"기다리셨군요, 토모야 군!"

"아, 뭐. 네."

"마실 것은 코코아가 좋습니까? 아니면 차?"

"코코아로."

"네, 여기 있습니다."

"어, 미리 타온 거예요?"

"그럼요. 토모야 군이 무엇을 원할지 정도는, 훤히 꿰뚫어보고 있으니까요."

"졸업을 해도 변하질 않네, 당신."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요."


와타루는 자신의 컵을 들고, 간식 거리를 토모야와 자신의 사이에 두었다. 각종 과자가 수북이 쌓여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집어먹으면 접시가 빌 정도였다.


"왔다갔다할 필요가 없겠네요. 양이 적당해서."

"네. 다만, 2인분을 계량해야 했기에 조금 고민했습니다. 토모야 군이 얼마나 먹을지 정도는 예상했지만! 그걸 손으로 덜어내는 건 다른 일이니까요. 자, 화장실이라도 다녀오죠. 영화의 중간에 일어서면 곤란하니까요."


두 사람은 차례로 화장실을 다녀왔다. 손을 깨끗이 씻고, 이제는 정말로 영화를 볼 차례. 와타루는 DVD를 꺼내 재생했다. 


"어라, 변태 가면. 영화를 볼 때는 50음도의 순서로 본다고 하지 않았어?"

"네, 분명 그렇게 얘기한 적도 있었죠."

"뭐야, 그 애매한 태도는. 아무튼 이 영화, '아'로 시작하잖아. 처음으로 돌아간 거야?"

"돌아갔다기 보다는, 토모야 군과 함께 영화를 보는 일은 처음이니 말이죠. 그러니 영화의 순서도 처음으로 두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렇구나. 아,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했다.

히비키 와타루는 히비키 와타루였다. 그의 행동이, 조금 꺼림칙했지만. 일단 자신을 놀래키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일상적인 행동에, 히비키 와타루를 조금 섞어둔 듯한 느낌이었다. 

아, 부모님이 지금 안 계시냐고 묻는 것도 깜빡했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도 잊어버렸어. 영화가 끝나면 물어봐도 되겠지만, 난 영화가 끝나면 돌아가야 하니까 타이밍이 맞지를 않네. 다음에 다시 부르면 찾아오면 되겠지. 과자를 한 움큼 집어먹자, 와타루도 한 움큼 과자를 가져갔다.

영화의 색감은 형형색색이었다. 어두운 거실이 다양한 색으로 변하는 광경은,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보물이다. 비록 타인의 집이지만, 이 일상의 공간이 몽환적으로 변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와타루가 집에서 홀로 영화를 보는 이유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이 집에, 기이함을 조금이라도 불어넣고 싶어서일지도 몰랐다. 

토모야는 지금 만족하고 있었다. 편안한 자리, 오랜만에 만나는 선배, 재밌는 영화. 그런데,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와타루를 위로해준답시고 왔는데, 오히려 자기가 아이돌의 압박감에서 조금, 해방되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제딴에 나를 위로해주겠다고 부른 건가? 이거, 괜히 걱정해줬네.

영화는 꽤 길었다. 러닝타임은 두 시간 정도였지만, 영화에 몰입감이 있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 킬링타임용으로도, 생각할 점이 많은 영화로도 보일 수 있었다. 와타루도 토모야도, 나름의 판단을 위해 진지하게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눈에 담았다. 이 영화가 끝나고 나면, 서로 감상을 나누려나? 이 장면은 좋아할 것 같으니까, 기억해뒀다가 말해주면 좋아하려나. 뭐, 이 사람은  예상했습니다! 라고 웃기는 하겠지만. 

영화가 끝나도, 부장과 더 같이 있을 수 있겠구나. 


영화가 끝났다. 집에서 볼 때는 크레딧이 흐를 때도 불을 켜지 않으니까 마지막까지 여운에 잠길 수 있다. 토모야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과자를 집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아직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과자는 여전히 토모야의 손에 잡힐 정도로 남았다. 크레딧이 전부 내려갔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부장? 영화 끝났어요. 불, 켜도, 되는데……."


그 순간 마시로 토모야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도했다. 히비키 와타루는 여전히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이었다. 그가 무대 위에서밖에 흘리지 않는 그것이었다. 언젠가 한 번, 그 이외의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 역시 연기인지 아닌지 토모야는 알지 못했다. 그럼 이 눈물 역시, 그의 연기일지도 모른다. 


"뭐하는 거예요, 부장. 안 놀란다구요?"

"어라, 무슨 말씀입니까 토모야 군? 잠시 여운에 빠져 있었을 뿐이랍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 우는 척하고 있잖아?"

"……네? 이 히비키 와타루가 울음을?"


와타루는 오히려 되묻고는, 자신의 볼을 더듬었다. 분명 따뜻한 것이 훑고 지나간 흔적이 있어, 턱에 눈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이거, 실례를 범했군요."

"어? 진짜로 우는 거였어? 영화가 그렇게 감동적이었나? 그런 종류였나……?"

"아뇨, 다른 종류입니다. 이건 이 히비키 와타루의…… 미천한 모습이죠."

"정말로 무슨 일 있었어? 도움이 필요하다면야, 말하면 되는데. 같은, 동아리였고."

"아아, 연극부. 저의 왕국……. 그렇습니다. 저는 그리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워 해? 당신이?"

"부정하고 있었습니다만, 달라지는 건 없군요. 저는 지금, 사랑을 앓고 있답니다! 사랑스러웠던 과거에, 유메노사키에, 과거의 왕국에!"

"하지만 졸업했는데…… 진로는 확실하잖아? 부장이라면 연극계에 얼마든지 진출할 수 있잖아. 벌써, 계약도 했다고 들었고."

"후후후, 토모야 군. 아무리 저라도, 아직은 10대입니다. 이 세계는 히비키 와타루의 세계는 될 수 없더군요. 저는 이 세계에 적응해 가야 합니다. 좀 더 많은 무대에 서기 위해,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이어지기 위해……."

"부장, 당신……."

"커뮤니케이션이란, 참으로 어렵더군요. 사람 대 사람으로, 평범하게 친해지는 법을 잊고 있었습니다. 수영하는 법도 모르고, 물 위에서 허우적댈 뿐이었죠. 너무나 지쳤던 겁니다. 하지만 토모야 군과는, 이렇게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고, 함께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 그런 말해도 기쁘진 않아!"


토모야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단순히 제 감상일 뿐이랍니다? 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죠."

"다른 이유?"

"토모야 군은, 이제 돌아가야 하니까요. 오늘 가족들은 돌아오지 않는답니다. 아마 토모야 군이 돌아가면, 저는 계속 영화를 보겠죠. 아침이 뜰 때까지…. 내일은 공교롭게도 일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아쉽군요. 이대로, 토모야 군을 보내는 건."


와타루는 다시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토모야는 크게 당황해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와타루는 과자를 한 움큼 집어먹었다.


"아아, 너무 이야기를 해버렸군요, 그럼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토모야 군. 정말 즐거웠어요. 잊을 수 없는 시간일 겁니다. 그리고, 고……."

"남을게!"

"……네?"

"내일 일정 없댔지? 마침 잘 됐네. 나도 없어! 이제 2학년이니까, 부모님에게 연락해서 친구네 집에서 자고 간다고 할게. 둘이서 실컷 영화를 보자. 그리고 다음에도, 시간이 나면 찾아올게. 아니면 부장이 우리 집에 와도 좋아."


토모야는 해결책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어, 신나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와타루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오히려 슬픈 눈으로, 토모야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저를, 동정하는 건가요, 토모야 군?"

"으응? 아, 아니. 그게, 나도 이렇게 돌아가긴 좀 그렇고."

"저는 추락했습니다. 정확히는, 다시 날아오르기 위한 준비지만요. 그런데 발돋움을 하기 위한 땅은 너무나 질척거려서, 제대로 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저를 위로해주면, 평범한 토모야 군은 온 몸에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버릴 겁니다. 저는, 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부장. 당신은 인간이잖아?"

"인간…… 네. 저는 인간이죠. 새도, 토끼도 아닌 인간."

"그러니까 나도 같은 인간이야. 당신이 과거에는 기인이라고 불렸어도, 지금은 힘든 거지? 그럼 진흙 정도야 조금 나눠도 괜찮잖아. 당신이 저 하늘에 있어서 내가 숨이 막히는 것도 아니니까. 얼마든지 떨어버릴 수 있는걸? 나도, 조금은 성장했어. 사람은 누구라도 좌절하고, 떨어지기도 해. 당신은 기인이니까 익숙하지 않은 거지.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세상이야. 돕게 해줘. 부장."


와타루는 토모야의 말을 듣고는 벙쪄 있었다. 이윽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왜 웃어?!"

"앗핫핫핫하! 제가, 토모야 군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놀랍군요! 그야말로 Amazing☆ 좋습니다. 토모야 군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제가 봐드리도록 하죠. 오늘 밤은, 당신과 나만이 있는 세상입니다. 토모야 군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하아, 물론이지. 얼마든지."

"그럼 과자를 더 가져오죠. 중간에 졸리다면 언제든지 이불을 덮고 자도록 하세요. 손을 댈지도 모릅니다."

"소, 손을 대……?"

"물론 농담입니다! 놀라셨군요! 뭘 기대한 건가요, 토모야 군? 저는 궁금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답니다!"

"시끄러워! 빨리 과자 가져와!"


그날 밤, 와타루의 집 거실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들은 웃고, 떠들고,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정말로, 즐거운 밤이었다.


WRITTEN BY
세메터리

,

     프로듀서과는 새로운 전학생을 받았다. 최초로 프로듀서과에 입학한 학생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선보인 관계로, 시험 삼아 학기 중에 전학오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자, 과연 소문을 듣고 전학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한 명의 프로듀서가 모든 유닛의 프로듀스를 전담할 수는 없기에, 전학생들은 프로듀서과의 교육 하에 한 유닛을 담당하는 형식으로 프로듀스를 시작했다. 프로듀서의 선택과 유닛의 승인이 있다면 프로듀스 계약이 성립한다. 

비록 패배하긴 했으나, 여전히 학원 굴지의 유닛인 fine에는 많은 프로듀서들이 몰려들었다. DDD에서 승리한 유닛인 Trickstar는 이미 첫번째 전학생이 프로듀스하고 있으니, 그에 비견되는 학원 굴지의 유닛을 프로듀스하고 싶다는 마음 탓일 것이다. 그런 연유로, 학생회장이자 fine의 리더인 텐쇼인 에이치와, fine 소속의 후시미 유즈루가 프로듀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이 말은 즉, 텐쇼인 에이치가 본인의 손으로, 자신들의 프로듀서를 뽑았다는 의미였다.


"……신뢰입니다."


텐쇼인 에이치는 프로듀서로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그녀는 당연한 듯이 이렇게 말했다. 에이치는 이 단어에서 여러 관계를 유추해냈다. 프로듀서와 유닛과의 신뢰가 먼저일 것이고, 유닛 멤버 간의 신뢰도 단연 중요하다. 그리고 아이돌과 팬 사이의 신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속성이다.

레슨 능력, 지식, 사랑 등 탐탁치 않은 답변 사이에서는 그나마, 이 답변이 fine의 리더의 마음에 들었다. 그도 Trickstar와의 싸움에서 느낀 것이 있기에, 어쩌면 그녀가 fine에 없던 신뢰라는 것을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텐쇼인 에이치는 후일 절망하게 된다. 차라리 자신의 말대로 움직이는, 인형을 골라냈어야 한다고.


-


fine는 1학기에 비해 더욱 성장했다. 새롭게 들어온 프로듀서는 과연 유능했고, 끊임없이 fine의 성장을 촉진했다. 그 성장을 바라본 사람들은 프로듀서의 능력을 칭찬함과 동시에, 텐쇼인 에이치의 선구안을 부러워했다. 

fine의 프로듀서, 쿠로미네 미카미는 평소에는 딱딱한 인상이지만 업무에는 열성적이며, 책임감 있게 유닛을 프로듀스해왔다. 가끔 기이한 행동을 했으나, fine에는 히비키 와타루가 있었다. 재능에 잇따르는 기행 정도는 fine와 그들의 팬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fine는 서서히 그들의 프로듀서에게 마음을 열었다. 학생회의 일을 돕거나, 함께 티타임을 가지며 쉬거나, 에이치의 병문안을 가거나 하며, 그들은 프로듀서와의 신뢰를 느꼈다. 

에이치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프로듀스 관련으로만 그녀와 대화를 하던 에이치는 어느새 좋아하는 음식에 관해, 그녀의 행동에 관해, 자신의 상태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어떠한 섬뜩함도 느끼지 못한 것은 에이치의 실책이었을 따름이다. 

그 텐쇼인 에이치가 아무 것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프로듀서의 애정은 보기와는 다르게 각별했다. 에이치의 몸 상태에 따라 수시로 바뀌고는 하는 fine의 일정을 세심하게 조정해왔다. 마치 언제 에이치가 아프고, 언제쯤 낫는지를 아는 것처럼. 단순한 의료적 통계만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그녀의 능력을 다시금 평가했지만 에이치는 모종의 불안을 느꼈다. 그러나 잘 움직이고 있는 유닛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꾹꾹 담아두었던 것이다. 

역시, 그래서는 안 됐다.


어째선지 꾸준히 활동하던 fine가 활동을 멈추는 주간이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에이치의 입원이었고, 프로듀서가 바빠서라는 말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 fine의 프로듀서이니 멤버들을 배려해 휴식기를 준 것일 거라고 이해했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이 둘 있었다. 

프로듀서 본인인 쿠로미네 미카미와 텐쇼인 에이치는 활동 정지의 이유를 안다. 그 이유는 아주 사적이었고, 폐쇄적이어야 했기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미카미가 움직이기 시작한 때는 그녀와 fine가 "우리는 서로 신뢰하고 있다"고 느낄 때, 정확히는 믿을 때부터였다.


에이치는 하지메가 돌아간 가든 테라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가든 테라스는 에이치에게 있어 심신을 안정시키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찻잔은 하지메가 가지런히 정리해두었다.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가든 테라스의 문이 열렸다.


"텐쇼인 선배, 계세요?"


에이치는 눈을 돌렸다. 미카미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자, 에이치는 표정을 풀며 그녀를 맞았다.


"날 찾아 온 거야? 그래, 무슨 일이야?"


     미카미는 일직선으로 에이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에이치는 홍차부의 활동에 자주 참여했던 미카미이니, 이 주변이 익숙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조금은 풍경을 즐겨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움이 남았다. 

일거리 때문이라면 전화도 괜찮은데. 에이치는 그렇게 착각하며 일어서려 했다. 툭, 그의 다리와 그녀의 다리가 맞닿았다. 에이치는 일어나지 못했다. 에이치가 고개를 들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에이치는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그녀는 에이치의 시선을 보았다. 


드르륵, 삭막한 소리가 가든 테라스의 적막을 비로소 그었다. 적막은 붉게 일그러졌고, 텐쇼인 에이치는 붉게 젖었다. 


에이치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숨을 멈추었다. 졸음처럼 밀려오는 아찔함이 이대로 의자에 등을 기대라며 재촉하는 듯 했다. 그는 의자의 팔받침을 잡았다. 살짝 물러선 미카미와의 틈으로 비척비척 벗어나서는 구급상자에 손을 뻗었다. 익숙하게 붕대와 소독약을 찾아낸 그는 미카미의 손목을 잡았다. 상처는 아주 가는 일직선이었지만 피가 끊이지 않고 솟아나왔다. 힘이 약했는지 지혈이 오래 걸렸고, 미카미의 손목에는 붕대가 감겼다. 


"……미카미쨩."

"네, 선배."


왜 그랬어? 라는 말을 씹어삼켰다.


"……이번주는 쉬자."

"네."

그날 에이치는 스트레스로 입원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누군가는 과일 바구니를 두고 갔다. 에이치는 이따금 구역질을 했다. 팔에는 수액을 꽂고 있어 움직일 수 없으니, 비상용으로 팔이 닿는 거리에 비닐봉지를 달아두었다. 실제로 무언가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에이치 자신은 기억이라도 뱉어낸다는 심정으로 구역질을 해댔다. 

그녀의 피는 진했다. 묽고, 척 봐도 건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자신의 것과는 달랐다. 자기 관리의 산물이라는 거겠지. 에이치는 여전히 그 피에서 사고를 떨어뜨릴 수 없었기에, 차라리 그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에이치에게 가장 두려울 사고는, 그것의 부차물일 것이었기에. 

그가 잠시 진정하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텐쇼인 선배."


그녀였다. 사실 에이치는, 그가 지금까지 보고 경험하고 맡았던 것이 한낱 꿈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손목에 감긴 붕대를 본 순간 박살나버렸을 뿐. 

그래도, 안심하고 있었다. 병원에 흉기를 들고 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여기서 그녀가 다시 손목을 긋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목적은 작은 사과와, 선물로 이루어진 병문안이겠지. 에이치는 애써 표정을 폈다. 

그녀는 텐쇼인 에이치의 시선을 보았다. 그것을 느낀 에이치는 본능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그녀의 눈에는 분명 동경이 담겨있을 텐데도. 

그녀는 여전히 동경을 담고,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쥔다. 손가락을 죈다. 그녀의 목에서 탄식이 꾸역꾸역 솟아오른다. 충혈되어 간다. 


에이치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몸을 일으키면 수액의 바늘이 빠질 것이고, 자신의 팔에서 피가 흐를 것이고, 삽시간에 자신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간호사를 부를 것이다. 간호사는 언제든 신속히 달려온다. 하지만 간호사를 부른다면? 그녀는 분명히 끌려간다. 자신이 없는 fine를 이끌어줄, 프로듀서가 사라진다. 그녀라는 프로듀서를 뽑은 실책이 드러나고 만다. 


사랑스러운 악마야, 너는 벌레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구나. 


에이치는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를 집어, 가능한 한, 있는 힘껏, 그녀를 향해 던졌다. 동공이 뒤집히려 하는 그녀는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이마에 사과를 얻어맞고 나동그라진다. 


     그녀가 쓰러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에이치는 아주,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이대로 그녀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도 알지 못하게, 은밀히 사용인을 부를까? 지금 그녀의 상태는 좋지 않아. 내 쪽에서 먼저 안정을 취하게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지금 여기서, 그녀를…….

미카미가 몸을 일으켰다. 조금은 놀란 듯, 머리를 감쌌지만 이상은 없어 보였다. 


"미카미쨩?"

"……네, 선배. 그런데,"


미카미는 팔을 떨며 시선을 피하는 에이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침대 위에 손을 올리고, 에이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는 바퀴벌레가 아니에요."


에이치는 몸을 떨었다. 식은 땀을 흘렸다. 


"…무슨 말일까, 미카미쨩. 놀라서… 말리려던 것 뿐이야."

"몸도 안 좋으신데, 푹 쉬셔야죠."

"아하하, 날 걱정해줘도 괜찮은 거야?"

"걱정해드리려고 왔으니까요."


공포스럽기까지만 했던 조금 전까지는 달리, 그녀는 평소와 다름 없는 상태로 말했다. 에이치는 휘말리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금 불쾌하기도 하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녀의 행동은 이상했다. 손목을 긋고, 자신의 목을 조르며 자신을 해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관리하는 유닛의 리더의 앞에서였다. 에이치는 그녀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에이치는 그녀를 신뢰했고, 그녀 역시 에이치를 신뢰하고 있을 테니까. 


"……미카미쨩. 혹시, 걱정이 있다면. 마음 놓고 말해도 좋아. 우리는 서로를 돕는 관계이기도 하니까, 너만 괜찮다면 이야기를 들을 시간을 낼게. 퇴원은, 금세 할 테니까."


미카미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에이치는 그녀의 눈에 달콤함을 보았지만, 정체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 감정은 그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그때 봐요, 선배."


     이 병실에는 거울이 없었다. 에이치는, 이 날 자신의 표정을 전혀 볼 수 없었을 것이고, 미카미는 그의 모든 표정을 보았다. 


-


     에이치가 퇴원하고, fine의 활동은 정상적으로 재개되었다. 에이치는 레슨이 끝나는 시간마다 가든 테라스로 미카미를 불렀다. 

자해의 이유를 직접 물어야 할까,  천천히 이야기를 끌어내야 할까? 에이치로서도 천천히 다가가야 하는 고민이었다. 지금껏 자신이 해왔던 싸우고, 쓰러뜨리고, 짓밟는 사투가 아닌, 신뢰하는 이들 간의 밀고 당기기는 에이치에겐 낯선 싸움이었으리라. 그러나 해내고 싶었다. 그는 말해주고 싶었다. 살아가도 된다고. 어떠한 죄를 품고 있다고 해도, 살아 있는 것에, 결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에이치는 그런 소망을 담아 미카미에게 다가간다. 신뢰의 끈이 서로의 마음을 잇고, 희망을 전하는 차의 향기가 가든 테라스를 가득 채우는 날이, 이어져 간다. 그녀가 에이치의 눈을 바라보며 웃는 날이 계속되었고, 그녀는 자해를 멈추었다.

 

어느덧 에이치는 만족하면서도 기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해를 멈추었으니, 이 티타임도 멈춰야 하나? 아니, 이 티타임이 그녀를 잡아주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 티타임이 끝나면, 그녀 역시 시작할지도 모른다……, 라며, 그녀의 미소에 익숙해진 에이치는 소중한 시간을 붙잡는다. 

당초의 약속은 미카미가 자해를 멈추게 돕는 정도였지만, 에이치는 그녀에게 티타임을 계속하자고 제안할 생각이었다. 오늘로 끝나야 하는 이 시간을, 좀더 잡아끌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새롭게 변할 시간에 기대하며, 무대에 선 듯, 어쩌면 그것과는 다른 감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가든 테라스의 문이 열린다. 언제나의 시간처럼, 그녀는 얼굴을 보였다. 에이치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 역시, 에이치의 눈을 보았다. 그녀는, 심히 만족스러워보였다.

미카미는 자신이 열었던 문을, 등으로 밀어 닫았다. 그 자리에서 멈춘 그녀를 에이치는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매에서 익숙한 것을 손에 쥐었다.  

에이치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서고 말았고, 

미카미는, 지체 없이 손목을 그었다. 


"……아아."


에이치는 크게 탄식했다. 


"미카미쨩, 어째서야?"

"뭘 묻는 건가요, 선배?"

"지금의……, 아니, 처음부터의 일들을."

"정확히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답니다, 선배."

"네가 어지른 게 보이지 않아?!"


에이치는 소리를 지른다. 미카미는 자신의 손목으로 살짝 시선을 옮기고, 다시 에이치를 보았다.


"이걸 말하는 건가요?"


에이치는 그것이라고 단언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지른 건 그 이상이었고, 그것은 미카미로서는 볼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널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아주 큰 착각이었던 모양이야."


그는 간신히 서 있는 듯한 모양으로 벽을 짚었다. 숨이 가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아, 이건 모순이구나.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나를 의지한다고 생각했는데, 주제넘은 생각이었구나. 혼자서, 행복하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놓고 말았어. 너는 여전히 악의로구나. 내게, 무얼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그는 손을 놓고는, 가든 테라스를 천천히 걸어다녔다. 미카미에게서 튄 피가 그의 신발 바닥에  닿았다.


"혹시, 내게 죽음의 공포를 알려주고 싶었어? 그 정도는, 항상 느끼고 있었지만 말이야. 아니면, 내가 이곳에서 저지른 죄악을 심판하고 싶었을까? 후후, 나는, 이미 유랑하는 황제야. 시체를 물어뜯고 싶었던 거라면 이해할게."


점점 모여드는 피가 웅덩이를 만드는데도, 에이치는 그 위를 걸어온다. 그는 그녀 앞에 선다.


"역시, 모르겠어."

"무얼 말인가요?"

"네가 나에게 웃어준 이유."

"그리고요?"

"네가 손목을 그은 이유, 항상 내 앞에서만 그래왔던 이유, 이제서야 나를 배신한 이유……."


순수했던 피웅덩이에 불순물이 섞여들었다. 점점 투명하게, 한 방울 두 방울이 붉게 파장을 뿜었다.


"나를 싫어하는 이유 말이야……."


에이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아뇨, 선배. 좋아해요."


미카미는 고개를 숙인 에이치를 끌어 안았다. 에이치가 천천히 손을 떼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선배의 그 표정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녀는 에이치가 자신의 얼굴을 숨기지 못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계속, 보게 해주세요."



 


WRITTEN BY
세메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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